[새날] 정성채 동양당한의원장…일흔에 화가로 첫 개인전 연 한의사…가꾸지 못한 '사랑을 회복하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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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16 08:03  |  수정 2022-12-19 13:51  |  발행일 2022-12-16 제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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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에 첫 개인전을 가진 정성채 동양당한의원장. 고향의 산 무등산 그리고 어린 시절 뛰어놀던 광주 태봉산, 온갖 고뇌와 갈등의 시기를 담은 절벽 구역을 담아 자기 의식의 구조를 3분할해서 그린 100호짜리 그림(고향 가는 길)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림이 완성된 건 1999년. 아직 관망중인 초벌 그림이라 야성 가득하다.

그는 지난주 목요일, 달성군 가창면 동제미술관에서 칠순을 맞아 생애 첫 개인전(사랑을 회복하다)을 갖고 '화가 선언'을 했다. 50여 작품은 수십 년간 남몰래 부적처럼 그려온 자신만의 삶의 편린이기도 하다. 정성채 원장은 지금 도우(道友)이자 동행 한의사인 아내(이지향 대표원장)와 함께 영남대병원 네거리 모퉁이 동양당한의원을 꾸려가면서 자기 그림의 제2막을 겨냥한 것이다.

유달리 그의 척추에는 신산스러운 '바람'이 서식한다. 그 바람은 그의 젊은 날을 종횡으로 관통했다. 그를 낭인처럼 방랑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오래 '풍운아'(風雲兒)였다. 5번의 인도행 그리고 어렵사리 확보한 아디야샨티의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정신세계사 출간) 등 정신세계 관련 원서 3권을 번역 출간했다. 그러면서 이승이 어떤 방식으로 저승으로 접어드는지를 알기 위해 캐나다와 미국의 명상공간을 훑고 다녔다. '역마살'로는 설명이 안 되는 서성거림의 나날이랄까. 빛 보다는 그림자 가득한 행로, 꼭 김성동의 장편소설 '만다라'에 등장하는 주인공 스님 지산과 같은 구도심을 품고 있었다. 한때 구도의 수단으로 민주화운동을 선택하기도 했다. 특별외무고시까지 합격했지만, 전력 때문에 고위공직자의 길을 서둘러 포기해야만 했다.

이승~저승길 알기 위해 북미 훑고 다녀
마음 실체 파내보고 싶어 출가하기도

77세 은퇴후 그림공부 '美 샤갈' 칭호
화가 해리 리버만 삶 스토리 큰 위안

사랑은 찾아 헤맬 행운 아닌 되찾을 힘
내 안의 색깔, 내 안의 美 재발견 고심
국내외 여행지서 만난 풍경 많이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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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기본기를 잘 보여주는 다양한 드로잉 작품.

◆마음의 뿌리를 찾아서

그는 마음의 한계, 그 끝, 그 실체를 파내 보고 싶었다. 성철과 법정 스님의 행적도 뒤좇았다. 범어사 지효 큰스님의 도골선풍에 반해 한 인생 안 태어난 셈 치고 덜컥 범어사로 출가한다. 하지만 그의 구도행은 승단의 엄격한 규율과 좀처럼 상합되기 어려웠다. 마지막 수행처가 바로 저잣거리, 일상(日常)임을 자각하게 된다. 이후 10여년 북미·남미의 땀집(sweat lodge)에서 수행체험을 한다.

그의 어머니는 세 아들을 엄격하게 훈육했다. 덕분에 형을 먼저 의사로 만든다. 어머니의 남은 꿈은 그를 공직자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어머니는 기고만장하기까지 한 그의 드센 팔자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그는 제도권의 피와 야인(野人)의 피를 동시에 갖고 있다. 수재(秀才)의 피를 타고 난 동시에 낭인(浪人)의 길을 동시에 통섭해야만 했다. 그 두 피가 그의 삶의 두 축을 이루면서 '합종연횡'을 거듭해 왔다. 제도권의 피는 그를 한의사로 빚었고 야인의 피는 그에게 그림을 안겨준다.

◆해리 리버만이 나의 뮤즈

그럴 때마다 그는 피카소에게 영향을 준 세무원 출신인 앙리 루소의 성취 그리고 화가 해리 리버만의 삶에서 크게 위안을 받는다. 해리 리버만은 그의 열정과 동질이었다. 단돈 6달러를 갖고 폴란드에서 미국으로 와서 훗날 부자가 되고 77세 은퇴한 뒤 뒤늦게 그림 공부를 해 '미국의 샤갈'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101세에도 개인전을 열었다. 그리고 103세에 작고했다. 그의 인생스토리를 알게 된 건, 2000년대 어느 날 서울 강남네거리 영업용 택시 안에서 흘러나오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였다. 일순 온몸에 전율이 일었고 순간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환희심을 느꼈고 그걸 모티프로 훗날 시까지 적게 된다.

고교 시절, 그의 잠재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단칼에 서울대 미대로의 길을 권유했던 첫 사부는 작고한 양인옥 전 호남대 총장이었다. 또 현재 동제미술관에 작업실을 두고 있는 화가 김길후도 그의 그림을 인정해주고 첫 개인전까지 도와준다.

그의 그림 앞에서 인터뷰했다. 일흔임에도 그한테서 나이 듦이 주는 피곤하고 권태로운 하중이 별로 감지되지 않았다. 탄탄한 드로잉 솜씨가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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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1997년).

◆첫 그림의 기억

그의 첫 그림에 대한 기억은 뭘까.

"세 살 무렵 저는 초가집 바람벽에 빙 둘러가며 숯 검댕으로 비행기를 그려놓았어요. 십자 모양의 몸체에 프로펠러를 네 개씩 그렸으니까 비행긴지 헬리콥터였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같으면 영락없는 첨단 드론 같은 거라고 봐요."

국민학교 시절, 제일 신나는 순간은 단연 미술 시간.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웬만한 그림대회의 상은 독차지였다. 하지만 상장 복은 4학년 때 멈춰버린다. 당시 지능검사에서 전남 최고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놀기 좋아하던 아이가 난데없이 수재 소리를 듣게 된 게 화근이었다. 선생들은 그림보다 그의 성적에 더 관심을 둔다. 그러나 그는 산수조차 불감당인 모순적인 아이였다. 허구한 날 상장 대신 매를 맞는다.

광주일고 시절 제주 출신 초청 미술 교사인 양인옥 선생. 그한테서 화가의 유전자를 발견해 준다. 식었던 그림이 양 선생의 인정 때문에 다시 활화산처럼 피어오른다. 그는 박상호·김주석과 함께 양인옥 미술의 3대 총아였다. 한번은 양 선생이 그의 부모를 찾아가 '서울대 미대 전면 장학생으로 보내겠다'는 말을 꺼냈다가 엄청 면박을 당하고 돌아선 일도 있었다.

전남대 신입생 시절, 그리세 클럽에 들어갔으나 뚜렷한 진전은 없었다. 사범대에 다니던 박태희가 황토로 범벅이 된 졸업작품의 평을 부탁한 적이 있다. 당시는 허백련 선생과 강인균, 오지호 정도밖에 몰랐지만 눈높이만은 한껏 높아져서 이중섭, 백남준 등에 관심이 끌리곤 했다. 문학적으로는 박주관, 나종영, 박용모, 박종권, 김순심 등과 시를 논하였으나 기억할 만한 시를 남기지는 못하였다. 곽재구, 나해철, 박재성, 박몽구 등은 아직 어린 후배였으나 문학에 열심이었고 그는 그림으로나 문학으로나 매력적인 주변인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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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아부시장(2020년).

◆정체성 혼란

대학 전후에 '정체성 혼란'을 많이 겪었다. 그 가운데 뚜렷한 한 각성이 있었다. 그건 '나는 초연한 관찰자, 여행자다'라는 믿음이었다. 그는 분명 행동자·혁명자는 아니었다. 드리머(dreamer)였다. 동굴 속의 히에로니무스(374~420·제1차 니케아공의회 이후의 보편교회 신학자이자 4대 교부 중 한 명)의 몰골에 반해서 수차 모사했던 적이 있고 테이레시아스(그리스 신화 등에 등장하는 테베 출신의 맹인 예언자)의 '제3의 눈'을 어떻게 표현할까 궁리하기도 했다. 초창기 그의 그림은 매우 괴기스럽고 세기말적이었다. 졸업 기념 시화전에 출품하여 호평받은 '너를 위하여'라는 시 액자가 지금 그에게 남은 학창 시절 그림의 유일한 흔적이다.

◆뒤안길을 누볐던 화력

전남대 상대에 입학, 1984년 동국대 한의대에 수석으로 편입 진학한다. 고생 끝에 한의사가 된 후 친척 매제인 김영화에게 유화를 배우기 시작했다. 1년 만인 1994년 광주 궁동갤러리에서 첫 그룹전 '바람·바램전'을 가졌다. 1995년 화순에 계신 양인옥 선생을 다시 찾았다. 유화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시작한다. 대구로 거처를 옮긴 후에도 부부는 화순을 자주 찾았다.

대구에 정착하던 해 95~96년, 구상화인 '삼선암'과 비구상인 '탄생', 뒤이어 백두산 천지를 그린 'Cold Heaven'을 제작하였다. 천지는 동아일보 신년호 1면 사진에 실린 국내 첫 항공촬영 된 천지의 장엄한 모습에 감동해 그려봤던 거다. 그 그림은 정점식 선생도 칭찬하신 바 있다.

그는 그동안 적잖은 비구상계열의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 개인전에는 초심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국내외 여러 여행지에서 만난 풍경을 많이 담았다. 마이산과 사랑은 25년째 미완이다. 청도의 최학노 선생과 알게 된 후에는 선생의 실험정신을 사숙하고 있다. 김일해와 이장우는 오랜 친구로 진지한 회화세계를 배우는 중이다. 아내도 미술에 심취해 있고 딸 녀석들도 다들 미술을 전공했다. 이 또한 행복한 일이다. 한국미술협회 정회원(2019), 한국미술대전 초대작가(2020), 대구미술협회 기획이사(2021) 그리고 대구 예인회에서 활동 중이다.

◆그림에서 배운 교훈

그림에서 배운 교훈이 있다. '세상에 실패한 그림은 없다는 것과 더 이상 못 쓰는 붓은 없다'는 것이다. 양인옥 선생의 말처럼 작품은 붓을 놓을 때 완성된다. 그림을 그리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없고 예술가 또한 눈을 감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이번 '사랑을 회복하다'란 개인전 주제에 부쳐, 글을 적었다.

'사랑은 장차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엇이 아니었다. 과연 오래전 하늘에서 내 마음밭에 떨어졌으나 그동안 내가 가꾸지를 못했다. 사랑은 찾아 헤맬 행운이 아닌 되찾을 힘이었다. 그림도 사랑처럼 내 안의 색깔 내 안의 미를 재발견해야 할 것이다. 조각이 깎아내는 것처럼 보석이 씻어내는 것처럼 나의 사랑도 그동안의 가식을 벗겨내고 내 고집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었다. (중략)'

그의 질풍노도는 칠십여 성상 돌고 돌아 이제 하구에 이른 강줄기처럼 화온한 자태를 갖추고 있다.

개인전은 내년 1월5일까지 가창면 헐티로 10길 18 동제미술관전시관.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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