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34] 伊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예수와 가장 닮은 프란치스코 성인…그가 영면한 언덕 위에 세운 대성당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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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1-06 08:07  |  수정 2023-01-20 08:10  |  발행일 2023-01-06 제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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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전경. 이 성당의 중심 지하에 성 프란치스코의 무덤이 있다.

"세속적으로 우리는 주교이고 사제이고 추기경이며 교황일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면 주님의 진정한 제자는 될 수 없다. 진정한 권위는 봉사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말자. 몹시 가난하고, 약하고,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을 끌어안아야 한다."

지구촌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 말이다. 가톨릭의 제266대 교황인 그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신대륙·남반구·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예수회는 가톨릭 교회의 남자 수도회. 아르헨티나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이던 그는 2013년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역사상 최초로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이탈리아 아시시에서 평생 청빈하게 살며 이웃 사랑에 헌신한 프란치스코(1182~1226)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겠다는 것이었다.

교황은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연대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필수 요소로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2023년 1월1일 제56차 세계 평화의 날(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기념하는 메시지를 통해서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도덕적·사회적·정치적·경제적 위기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가 고립된 문제로 보는 것은 실제로는 서로의 원인과 결과"라며 불평등의 바이러스와 싸우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울 것을 촉구했다.

가톨릭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기려 건립한 이탈리아 움브리아주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을 밖에서만 둘러보고 온 적이 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짧은 시간 동안 보냈지만, 인상이 매우 깊었던 곳이 아시시다. 대성당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시시 마을과 주변의 풍경이 평화롭고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멀리 보이는 산자락과 그 앞에 펼쳐진 넓은 들판, 산자락 끝에 있는 큰 성당과 오랜 역사가 묻어나는 주택 건물 등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드물게 마음을 편안하고 충만하게 했다.

빌린 차를 곳곳에 세우면서 아시시를 둘러보고 떠나왔는데,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컸던 곳이다.

아시시 범죄자 처형된 '지옥의 언덕'
예수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과 닮아
프란치스코 성인, 사후 묻히길 바라

하부 성당에 유해 봉안 후 상부 건축
600년 지난 19C초 숨겨진 묘소 발견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위한 헌신적 삶
세계 곳곳 순례자 참배 이어지는 성지


아시시(이탈리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아래는 밀과 해바라기 등을 심은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들판의 해바라기밭과 마을.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

아시시의 상징 건축물이기도 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매장된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중심지인 이곳은 순례자들의 참배가 이어지는 성지이자 일반 관광객들도 적지 않게 찾는 곳이다. 2000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프란치스코회 유적'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1226년 10월에 선종한 성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지역에서 범죄자들이 처형되는 장소였던 '지옥의 언덕'이 예수가 못 박힌 골고다 언덕을 닮았다며, 죽은 뒤 그곳에 묻히기를 바랐다. 선종 2년 만인 1228년 7월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시성(諡聖)하였고, 이를 기념하고자 프란치스코 무덤 위에 성당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의 시성식이 거행된 다음날인 7월17일에 대성당의 초석을 놓았다. 언덕 경사면에서 공사를 진행하였기 때문에 전체 구조는 하부와 상부로 나누어 지어졌다.

1230년 5월 새로 지어진 하부 성당에 유해를 봉안했다. 상부 성당 건축은 1239년부터 1253년까지 진행됐다. 교황 니콜라오 4세는 1288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에 '교황 성당(Papal Church)'이라는 지위를 부여했다.

프란치스코가 1209년에 창립한 탁발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는 프란치스코의 무덤을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겼다. 무덤을 숨긴 목적은 이슬람 세력을 걱정해서였다고도 하고, 이탈리아 가문들 간 싸움 때문이었다고도 한다. 무덤은 단지 하부 성당의 어딘가에 있다는 수준으로만 전해졌다.

600년 가까이 지난 19세기 초, 교황 비오 7세에게 허가를 받아 고고학자들이 하부 성당에서 묘소가 있을 만한 곳을 조사해 1818년에 결국 숨겨진 묘소를 발견했다. 하부 성당의 제대 앞에 입구가 있었고, 입구 위를 덮어 성당 바닥과 일체화하여 위치를 숨겼던 것이다. 바닥을 뜯어 입구를 찾아내자 13세기에 무덤을 보호할 때 쓰던 철제 난간이 있었고, 통로를 따라 내려가자 프란치스코의 관을 안치한 지하석실이 나타났다. 관이 있는 위치는 하부 성당의 제대 아래쪽과 거의 일치했다.

1997년 9월26일, 이탈리아 움브리아와 마르케 지방에 리히터 규모 5.5와 6.1의 강진이 연달아 발생했다. 하부 성당은 무사했지만,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상부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는 산산조각이 나는 피해를 보았다. 그 후 30만 개가 넘는 벽화 파편들을 기존에 촬영된 사진 자료와 컴퓨터를 이용해 짜 맞추는 작업을 통해 복원에 착수, 3년여 만인 2000년에 세상에 공개되었다.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28점의 연작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9월 이곳을 방문해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안치된 곳에서 기도한 뒤 성당 앞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

유럽 사람들은 아시시라고 하면 성 프란치스코(1182~1226)를 떠올린다. 수많은 순례자는 '가난과 결혼한 수도자' '예수 그리스도와 가장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불리는 그의 헌신적인 삶을 기린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며 이웃 사랑에 헌신한 성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옷감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어서 향락을 추구했던 그는 1202년에 이웃 도시 페루자와의 싸움에서 포로가 되어 1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말라리아를 앓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에 따라서 살 것을 결심했다. 1205년 이후 프란치스코는 재산과 가족을 포기하고 청빈과 이웃 사랑에 헌신했다.

1209년 프란치스코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수도회 설립 인준을 요청하기 위해 11명의 제자와 함께 로마로 갔다. 이들을 만난 교황은 처음에는 프란치스코가 제출한 회칙의 생활 양식이 너무나 이상적이며 엄격하다는 이유로 인준을 유보하였으나, 그날 밤 꿈에서 쓰러져가는 산 조반니 대성전을 프란치스코가 어깨로 부축하여 세우는 장면을 보고, 다음 날 수도회를 인준했다.

이후 '작은 형제들의 모임'(프란치스코회의 정식 명칭)의 수도사들은 예수의 생활을 본받아 청빈하게 지내면서 가난한 사람과 병든 사람을 위로했다. 프란치스코는 1212년에는 여제자인 성녀 클라라(1193∼1253)에게 권유해 '가난한 클라라 수녀회'를 설립하게 하였다. 그녀 또한 성녀였다. 그녀는 매일 허름한 수도복을 입고 사시사철 맨발로 다녔으며, 삭발한 머리에는 흰 두건과 검은 수건을 쓰고 다녔다. 잠자리는 맨바닥 위의 요였고, 베개는 나무토막이었으며, 공동침실은 춥고 적막했다. 식사는 대개 하루에 한 끼만 먹었고, 주일과 성탄절에만 두 끼를 먹었다. 고기와 포도주는 언제나 금했고, 주로 빵과 채소를 먹었다. 달걀이나 우유가 생기면 병자들에게 주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죽은 지 30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이들 탁발 수도사들은 10년도 안 되어 그 수가 5천명이나 되었고, '작은 형제회'는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갔다. 성 프란치스코는 1226년 10월4일에 아시시에서 별세했다.

성 프란치스코와 관련해 이런 일화가 전한다. 그는 믿음과 수도 생활에 투철한 성인이었으나, 남자로서 느끼는 성욕을 떨치는 일이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느끼는 욕망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면서, 틈만 나면 장미 가시덤불 위에서 맨몸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피어난 아시시의 장미들에서는 가시가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아시시의 산타 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 마당에 피는 장미꽃들은 가시가 없다고 한다. 아시시를 벗어나 다른 곳에 심으면 장미 가시가 생겨나고 다시 아시시로 옮겨와서 심으면 다시 가시가 없어진다고 한다.

◆아시시

아시시는 이탈리아 중부 움브리아주 북부의 아펜니노 산맥의 남서쪽 기슭 위에 있다. BC 295년 로마인들이 아시시움(Asisium)을 건설하면서 현재의 도시명 '아시시'가 탄생했다. 수바시오 산기슭에 있는 아시오(Asio)라는 구릉의 비탈에 건설된 아시시는 이탈리아의 '푸른 심장'이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아시시에서는 성벽, 극장, 원형 경기장, 미네르바 신전(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으로 바뀜) 같은 옛 로마 흔적들을 여전히 볼 수 있다. 1997년에는 폼페이 같은 드문 상태의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화가 잘 보존된 방이 있는 고대 로마의 빌라 유적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아시시는 로마 시대에서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도시이면서 성소(聖所)로서 유지되어 온 독특한 지역이다. 아시시의 문화 경관, 종교 건축물, 교통 체계 및 전통적 토지 사용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예술과 건축 발달에 큰 영향을 준 뛰어난 예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예술과 종교 정신의 교류는 전 세계의 예술과 건축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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