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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은 세상에 흩어지는 말을 모으는 것이다." 1960년대 민음사를 창립한 박맹호 회장이 한 말이다. 책에 대한 수많은 묘사 가운데, 가치와 효용 측면에서 특히 인상에 남는 구절이다. 거대 자본이 유입되고 산업적 파급력이 막강해진 대규모 출판 현장 속에서 여전히 소외되거나 사라지는 목소리를 유심히 살피는 기획자들이 있다.
그래픽 디자이너 민동인은 자신이 운영하는 '좀비출판'에서 얼마 전 '스몰 스튜디오, 스몰 신, 대전, 대구'라는 책을 펴냈다. 책은 대전과 대구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대담 그리고 두 도시의 주목할 만한 디자인 장면들을 담았다. "두 도시를 한국 디자인 신이 가진 하나의 사례로 인정하고 독해할 이유가 충분하지만, 이제까지 기록과 논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기획의 글에서 그는 서울 중심의 한국 디자인 담론에 대항한다. 그는 중심에서는 보이지 않는 (또는 보려고 하지 않는) 장면을 포착하고 지방 도시의 디자이너들을 지면 속으로 (세상 밖으로) 초대했다.
페미니스트 디자이너 클럽 'FDSC'
유리천장 문제 등 남성중심제도 반기
지역 시각분야 노동자 사각지대 갇혀
클라이언트의 몰이해와 잘못된 관습 탓
민동인 발간 서적 '스몰 스튜디오…'
서울 중심의 한국 디자인 담론에 대항
굿퀘스천, 노네임프레스, 백색공간, 스튜디오엔아이엔, 슬로먼트, 실기활동. 책에 소개된 대전의 스몰 스튜디오다. 이제 막 운전면허를 땄다는 신선아 디자이너는 그들의 행보를 운전에 비유한다. "목적지만을 향해 내달리지 않고, 이 도로가 왜 험난한지, 더 안전하게 조성해 모두의 안녕을 꿈꿀 수는 없을지를 고민하며 운전하고 싶어요." 신지연 디자이너는 "한때 브레이크도, 내비게이션도 없이 달리다가 바퀴가 몽땅 빠져버린 적이 있다"며 이후로는 안전하게 차를 모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한다. 전민제 디자이너도 "오래 운전하고 싶고, 좋은 차를 타고 싶다"고 한다. 아직은 험난한 도로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운전석에 앉아있지만 모두 디자인 스튜디오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고 있다.
구김종이, 낫심플 스튜디오, 샤이 스튜디오, 스튜디오 유연한, 위앤드, 일로스튜디오, 티사웍스, 황보석주. 책에 소개된 대구의 스몰 스튜디오다. 임지수 디자이너는 대구의 일자리 부족 문제를 지적하며 젊은 자영업자가 많은 이유를 짐작한다. 몇 년 사이 대구의 F&B(food & beverage·식음료)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디자이너의 수요가 급증한 것도 비슷한 이유로 해석된다. 수제화 골목에 사무실을 낸 이원오 디자이너는 도시재생이 오히려 문화 공동체에 균열을 내는 폐단을 지적한다. "'먹고사니즘'을 자신의 가장 큰 행동 원리로 삼는다면, 남은 건 세상을 착취하는 일밖에 없어요. 디자이너 자신도 직업윤리를 가지고 올바르게 일해야겠습니다." 구민호 디자이너는 한강 이남 최고 기술을 자랑하던 남산동 인쇄골목 부지 이전과 인쇄 기술의 몰락을 거론하며, 건설 개발 위주의 도시 정책을 안타까워한다. "클라이언트의 몰이해와 잘못 자리 잡은 관습들 탓에 대구지역에서 일하는 절대다수의 시각문화 분야 소수 노동자는 인원 사각지대에서 스스로 양초처럼 불태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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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완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
책에는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디자이너들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처참할 정도로 열악한 지방 도시 디자이너의 삶이 기록되어 있는 책을 읽다 보면 한편으로는 이곳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의 선택이 소중하면서도 의아하다. 아마도 얼마 동안은 이들의 희생과 시행착오가 이어질 테지만, 이것이 변화의 시작이라는 것은 충분히 직감할 수 있다.
변화는 어떻게 만들어질까. 2016년 한국 사회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태는 가히 충격이었다. 2017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미투 운동(Me Too movement) 또한 디자인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의 SNS와 언론 보도를 보고 있노라면 오랜 시간 동안 침묵했던 문학, 미술, 디자인 등 창작 분야의 잘못된 관습과 적폐에 대한 대가를 우리 스스로 크게 치르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몇 가지 변화가 눈에 띄었다. 여성 디자이너 정책 모임 WOO의 활동 중에서 2017년 겨울 열린 'W쇼: 그래픽 디자이너 리스트'는 가시적 성취다. "이 전시는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 널리 퍼진 남성 중심적 시각과 서사에서 벗어나, 여성 디자이너의 존재와 활동을 인정하고 기념하며 기록하려는 노력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밝힌 기획의 글에서 우리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으려는 디자이너의 의지를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2018년에는 FDSC(feminist designer social club·페미니스트 디자이너 소셜 클럽)가 결성되었다. '그래픽 디자인계의 성차별적 관행에 맞서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변화를 이끌어가는 모임'이다. (https://fdsc.kr/) "그 많던 여성 디자이너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물음은 한국 디자인계의 유리천장 문제, 임금 불평등 문제, 조직 속에 만연한 남성중심주의 제도들을 날카롭게 찌르며 디자이너들에게 깊은 관심과 지지를 받았다. FDSC는 어느덧 230여 명의 회원을 갖춘 단단한 모임으로 성장했다.
지난 1월 말, 대구에서 'FDSC 오픈 데이'라는 디자인 행사가 열렸다. '오픈 데이'는 FDSC가 회원을 모집하는 방법이다. 운영진과 기존 회원들이 가입을 희망하는 예비 회원을 초대해서 설명회를 여는데, 이를 대구에서 개최한 것이다. 불평등과 부조리를 바라보던 그들의 예민한 시선은 지역 문제에 관해서도 역시 민첩하다. 어딘가로부터 배제되는 것, 목소리를 낼 기회조차 차단당하는 것, 누군가에게는 보이지 않는 폭력성은 FDSC에는 참을 수 없는 문제이리라.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주변의 이분화에 대한 문제 제기와 이를 극복하려는 분위기는 어느덧 지방 도시 청년의 삶을 생각하는 데 있어 중요한 화두다.
디자인 저술가 전가경은 앞선 책에 '그래픽 디자인의 서울 중심주의, 그 너머로: 초지역 디자인을 향한 네 가지 제언'을 기고했고, 이를 'FDSC 오픈 데이'에서 발제했다. "①교류하기: 거대 수도권 디자인 서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지역 간의 일사불란한 교류가 필요하다. 중요한 건 초지역성이다." "②배우고 발굴하기: 홀로 작업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기분이라면 동료들과 리뷰 시스템을 만든다. 자치기구를 만들어 배움의 학습터를 스스로 만든다." "③스스로 발화자가 되기: 그간 수신자의 위치에만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발화자의 위치에 자신을 재배치하면 된다. 이때 명심할 것: 지역을 다루되 지역성에 갇히지 않기. 지역을 함부로 정의하지 말기." "④다른 디자인을 상상하기: 지역과 수도권이라는 권력 구도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것은 수도권 체제를 이곳에 도입하고 이식하는 일이 아닌 그와는 다른 체제를 설비해 나감을 의미한다." 그의 제언은 선명하고 선언적이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에서 자신 있게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시선은 지리적·공간적 울타리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전국을 순회하는 시혜적 태도가 아닌, 당면한 문제의 한복판에서 함께 공부하고 실천하는 FDSC의 운영방침이 더욱 반갑고 소중하다.
'What is your common life?(당신의 보통은 무엇인가요?)' FDSC 회원과 예비신입회원 40여 명이 모인 제로웨이스트숍 '더 커먼' 외벽에 커다랗게 쓰여 있는 문장이다. 끊임없이 묻고 있다. 무엇이 보통의 삶일까. 그 안에서 오고 가는 '특별한' 대화와 제안, 선언이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성차별 없이, 지역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몸짓과 목소리로 멋지게 활동할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자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삶은 '보통'이어야 한다.
북디자이너·영남대 시각디자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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