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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탁신 친나왓 전 타이 총리의 딸 패통탄 친나왓. 연합뉴스, 아웅산 수찌 버마 국가고문,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 전 인도네시아 대통령. 정문태 방콕특파원 |
"나를 비롯한 상원의원이 패통탄 친나왓은 안 찍을 것이다. 총리 자리는 누구의, 어떤 가문의 장난감도 아니다. 총리는 국민 자존심의 상징이고 과거처럼 아무나 총리로 삼는 건 옳지 않다." 지난 토요일 상원의원 완차이 손시리가 으름장을 놓으며 페이스북을 달궜다. 패통탄은 2006년 쿠데타로 쫓겨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막내딸이자 프아타이당(PTP)이 차기 총리 후보로 일찌감치 내세운 정치적 상징이다.
완차이는 "조심하라. 프아타이당이 패통탄을 총리 삼으려면 상·하원 750석 가운데 376석을 얻어야 한다"고 친절한 경고까지 덧붙였다. 총리를 뽑는 하원 500석과 상원 250석을 합한 양원 750석을 가리키는데, 상원은 2014년 쿠데타로 권력을 쥔 현 총리 쁘라윳 짠오차가 초헌법적 권력기구인 국가평화질서위원회(NCPO)를 통해 지명한 정치적 안전판이다. 어떤 정당도 직접선거로 뽑는 하원 선거에서 376석을 못 얻으면 독자적으로 총리를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지난 총선에서 제1당이었지만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한 프아타이당의 의석이 기껏 131석임을 놓고 보면 한 정당이 376석을 얻는다는 건 현실성도 별로 없고.
타이·인니·버마·인디아·파키스탄…
2차 대전 후 식민 통치 벗어났지만
정치적인 혼란에다 압제까지 경험
민주주의체제 제대로 익히지 못해
암살·처형 등 '비극적 서사' 자녀들
시민사회 연민·온정주의 등에 업고
치명적 결함 선거제 통해 권력세습
후예도 즐비…농단 쳇바퀴 도는 꼴
그러고 보니 올해 아시아에는 유난히 선거가 많다. 타이뿐 아니라 3월 카자흐스탄 하원 선거, 4월 부탄 상원 선거, 5월 동티모르 총선, 최근 지진 피해를 본 튀르키예의 6월 총선과 대통령 선거, 7월 캄보디아 총선, 10월 오만 총선 그리고 아직 일정이 안 나온 싱가포르 대통령 선거, 파키스탄 총선, 투르크메니스탄 하원 선거가 줄줄이 걸렸다. 2021년 쿠데타로 권력을 낚아챈 민 아웅 흘라잉 장군이 떠벌린 올 8월 총선은 회의적이지만 버마도 있고, 아무튼.
소수의 뜻을 담아낼 수 없는 숫자놀음이란 한계를 드러냈지만 선거를 통한 권력 창출은 여전히 민주주의 징표처럼 곳곳에서 벌어진다는 뜻이다. 실제 그 권력이 민주주의든 아니든 아무 상관 없이. 예컨대 2016년 탱크몰이 쿠데타로 정치판을 뒤엎고도 새 헌법이랍시고 들이대고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 권력 탈취를 한 지금 타이 정부처럼. 그게 버마였고, 그게 파키스탄이었다. 남의 얘기할 것도 없이 그게 대한민국이었다. 현실적 대안 없는 이 선거제도, 아시아 정치판을 보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아시아에서는 이 민주 선거제도란 게 오히려 봉건적 전통을 대물림하며 정치 독점화를 부추긴 연장 노릇을 해왔다. 이른바 가문정치다. 이게 자본과 함께 쌍끌이 세습으로 아시아 시민사회를 휘둘러온 고질이다.
타이에서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가문이 좋은 본보기다. 여동생 잉락 친나왓과 매제 솜차이 웡사왓(또 다른 여동생 야오와파 남편)까지 총리 셋을 배출했다. 필리핀에서는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 베그니노 아키노 3세가 대통령을 한 데 이어,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마르코스 주니어가 지난해 대통령이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초대 대통령 수까르노의 딸 메가와띠 수까르노뿌뜨리가 대통령을 했고, 스리랑카는 솔로몬 반다라나이케와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가 부부 총리를 한 데 이어 그 딸인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쿠마라퉁가가 대통령을 했다. 방글라데시는 셰이크 라흐만 전 대통령의 딸 셰이크 하시나 총리와 지아울 라흐만 전 대통령의 부인 베굼 칼레다 지아 총리가 30년 넘도록 번갈아 가며 권력을 나눠왔다. 파키스탄에서는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총리를 물려받았고, 버마에서는 국부로 받들어온 아웅산 장군의 딸 아웅산 수찌가 2021년 쿠데타로 수감당하기 전까지 국가고문으로 실질적인 대통령 노릇을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통령 박정희의 딸 박근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이게 다가 아니다. 아직은 권력을 못 쥐었지만 머잖아 가문정치의 대를 이을 '아이들'이 즐비하다. 타이엔 탁신 전 총리 딸 패통탄(36) 코앞에 총리 자리가 어른거린다면, 캄보디아엔 38년째 세계 최장기 총리 자리를 지켜온 훈 센의 아들 훈 마넷(45)이 이미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의 세습 절차를 마치고 차차기쯤을 기다리는 중이다.
싱가포르는 리콴유 총리에서 그 아들 리셴룽 총리로 이어진 권력이 3대 리홍이(36)로 세습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리패밀리가 차기 권력을 놓고 내분에 휩싸였다. 인디아도 빼놓을 수 없다. 초대 총리 자와할랄 네루의 딸 인디라 간디 총리 그리고 그 아들 라지브 간디 총리에 이어 4대째인 프리양카 간디(51)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왕조의 숙성을 향해 달리고 있다.
"탁신이 없다면 여동생 잉락이든 매제 솜차이든 총리를 상상이나 해봤겠나. 그 이름을 누가 알 것이며. 우리 사회가 가문정치를 덥석 받아들인다는 건 아직 삭디나(봉건 계급제도)에서 못 벗어났다는 증거다." 타이 언론인 쿠수마 욧다사뭇 말마따나 아시아는 봉건 왕조체제가 사라진 자리에 현대판 왕조가 똬리 튼 꼴이다. 그 즉위 과정이 허울 좋은 선거제도를 거쳤다는 차이 뿐이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든, 장기 독재를 했든, 세습을 했든 모든 가문정치가 선거를 통해 합법성을 챙기고는 버젓이 권력을 대물림했다. 민주주의 징표라는 선거제도가 신흥왕조 탄생에 이바지하는 반역의 연장이 된 셈이다.
아시아의 가문정치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저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식민통치 족쇄에서 벗어나 정치적 혼란과 압제를 경험한 역사적 배경을 지녔다. 다른 말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를 익힐 만한 틈이 없었다는 뜻이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 바탕과 훈련 없는 선거제도가 지닌 치명적 결함으로 드러났다.
또 하나 아시아 가문정치에는 비극적 경험이 서려 있다. 가문정치를 열어젖힌 파키스탄의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 스리랑카의 솔로몬 반다라나이케 총리, 방글라데시의 지아울 라흐만 대통령과 셰이크 라흐만 대통령, 버마의 아웅산 장군, 필리핀의 베그니노 아키노 상원의원,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모두 암살이나 처형으로 최후를 맞았다. 인도네시아의 수까르노 대통령과 타이의 탁신 총리는 쿠데타로,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시민혁명으로 몫몫이 쫓겨났다. 아시아의 온정주의는 그 비극을 연민으로 받아들이며 가문정치에 표를 던졌다. 아시아의 선거문화가 지닌 덫이었다.
그렇게 비극으로 출발한 가문정치는 후대에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인디아의 인디라 간디와 나지브 간디 모자 총리와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총리는 암살당했고, 스리랑카의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폭탄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고, 버마의 아웅산 수찌 국가고문은 감옥에 갇혔다. 박근혜도 그렇고. 비극을 먹고 자란 가문정치가 결국은 비극의 쳇바퀴를 굴리는 꼴이다. 가문정치의 순서를 기다리는 후예들이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또렷한 건 하나 있다. 애초 권력의 후광을 입고 특별한 환경에서 오롯이 대접만 받고 자란 가문정치가 봉건왕조의 복제품으로 아시아 사회를 농단해 왔다는 사실이다. 정치의 계절을 맞은 타이를 복잡한 심사로 바라보는 까닭이다.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아직 갈 길이 너무 먼가도 싶은 게.
〈국제분쟁 전문기자·방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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