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창] 회복적 정의는 어디로 갔는가

  •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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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08  |  수정 2023-03-08 06:57  |  발행일 2023-03-08 제26면
아들 학폭 사건 정순신 낙마

반성 외면한 이기심에 공분

처벌보단 상처 치유에 중점

학폭자치위제도 유명무실

회복적 정의 실현 방안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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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국가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인사가 아들의 학교 폭력에 관련된 처사 문제로 하루 만에 낙마한 지도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매스미디어를 도배할 만한 커다란 이슈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나, 이 사안에 대한 대중의 주목도는 조금도 줄어들 기미가 없는 듯하다. 시민적 분노는 정확하게, 각종 법 기술을 동원하여 불리한 처분의 효력을 늦추거나 사실상 무효로 만들려고 시도하면서도,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반성을 철저히 외면한 채 고위공직을 차지하고자 했던, 한 법률가의 매몰찬 이기심을 겨누고 있다.

법 공부를 생업으로 삼는 사람으로서, 나는 잠시 이 시민적 분노의 흐름에서 비켜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문제가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이 사안의 한복판에 놓인 학교폭력자치위원회제도는 2004년 1월 학교 폭력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기존 형사법이 상당히 부적절하다는 논의 맥락에서 특별법 제정으로 도입되었다. 그 배경은 대안적 형사 절차의 이념으로 주목되었던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였다.

회복적 정의는 응보적 정의에 기초한 기존 형사법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대표적인 학자인 하워드 제어에 따르면, 이는 가해자로 하여금 자신의 책임과 감정의 변화를 거부하게 조장하고, 피해자의 요구를 무시하게 만들며, 범죄의 악순환을 낳는 환경을 형성하고, 범죄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더욱 악화시킨다. 그는 어떤 법을 누가 위반했느냐를 묻고 어떤 형벌로 응징해야 하는지를 따지는 방식으로 과연 정의가 실현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정의의 실현과 상처의 치유를 별개의 문제로 치부하는 한 사정은 나아지기 어렵다고 그는 평가한다.

이에 대하여 회복적 정의는 상처 입은 범죄 피해자의 호소를 형사 절차의 중심에 놓는다. 그리고 누가 상처를 입었는지, 그의 요구는 무엇인지, 그 피해는 누구의 책임인지를 묻고 대답하려면, 범죄로 인한 상처가 발생한 공동체 그 자체에 형사 절차의 중추 역할을 맡긴다. 상처 입은 피해자의 호소를 깊이 새겨듣는 공동체 그 자체가 나서지 않으면 사실 확인, 정의 실현, 상처 치유는 이루어질 수 없다.

20년 전 '학교 폭력 대책 및 예방에 관한 법률'을 제정할 때, 국회는 아마도 한국 사회에서 공교육을 담당하는 각급 학교들이 회복적 정의를 주도적으로 실천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고 전제했던 것 같다. 이는 모든 학교에 교사, 학부모대표, 법률가, 경찰공무원, 청소년 전문가로 구성된 학교폭력자치위원회를 의무적으로 설치한 점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최근에 벌어진 사태는 국회의 그와 같은 전제가 아무런 근거가 없었음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있다. 학교는 이미 공동체로서의 정체성과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고, 상처 입은 피해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려는 노력은 거듭 실패했으며, 오로지 기존 형사법에 밝은 법률가들만이 온갖 법 기술로 회복적 정의의 작동을 방해해 왔던 것이 아닌가?

몇 년 전 미국 출장길에 버지니아 서쪽 시골의 작은 대학에 근무하는 하워드 제어 박사를 찾아 만난 적이 있었다. 역사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법학에는 문외한이었으나 비폭력평화주의로 잘 알려진 메노나이트 교단의 갈등화해사역에 헌신하다가 회복적 정의론을 연구하게 되었고, 여전히 법학은 잘 모른다고 겸연쩍게 말했었다. 그 앞에서 나는 한국의 학교폭력자치위원회제도를 회복적 정의의 중요한 실험인양 자랑하듯 얘기했었다. 한데, 지금은 차마 머리를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심정이다. 회복적 정의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이국운 (한동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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