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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진 대구대 총장 |
햇살 좋은 날이면 문득 좋은 풍경을 찾아 길을 나선다. 예전에는 미리 목적지를 정하고 가는 경로도 꼼꼼히 살펴보곤 했지만 내비게이션이 일상화된 요즘에는 그냥 길을 나서 안내에 따라 목적지를 향하면 처음 가는 길도 곧잘 찾아갈 수 있다. 여정을 마치고 돌아보면 가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멋진 장면을 만난 기쁨도 있고 인상적인 장면 몇몇은 시간이 흘러도 떠올라 빙긋이 웃음 짓게 된다. 신기한 것은 가는 길은 매번 멀고 제법 시간이 걸렸다 싶은데 같은 길로 되돌아와도 오는 길은 가깝고 금방 왔다고 생각되는 일이다.
우리 모두 익히 알고 있듯이 사람은 경험한 모든 것을 그대로 기억하지 않는다. 필자는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아침에 집을 나서 학교에 오기까지 보았던 장면 가운데 기억에 남는 어떤 장면이 있는지 물어보곤 한다. 이 질문은 학생들이 배우는 전공과 관련된 것인데 학생들은 낯설고 새로운 장면에 대해서는 곧잘 말하지만 매일 마주하는 소소한 일상은 특별한 에피소드가 없으면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같은 장면을 동시에 목격하여도 기억하는 장면은 사람마다 제각각이고 저마다 말하는 내용도 다르다.
개인들이 여러 경험에서 기억하는 장면이 제각각이듯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도 사람들이 저마다 기억하는 일은 연관된 사람 모두에게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오랜만에 옛일을 추억하다 보면 친구는 분명하게 기억하는 일이 내게는 전혀 낯설고 떠오르지 않는 때가 허다하다. 내가 친구에게 한 어떤 말과 행동을 친구는 오랫동안 잊지 않고 있는데도 정작 나는 전혀 모르고 있거나 다르게 추억하는 일도 있다. 친구들끼리 옛일을 이야기하다 가벼운 다툼으로 이어져 자리에 없는 친구에게 전화로 뜬금없는 질문을 한 적도 있다.
친구들이 함께 겪은 일 중에는 누구에게는 오래 기억되고 상처로 남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넘어간 일이 뒤늦게 달리 기억되는 사례도 더러 있다. 물론 친구가 꺼낸 옛일 중에는 잠깐 논란을 벌이고 나면 함께 나눌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 일이 많겠지만 드물게는 누구에게도 선뜻 말하기 어려웠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혼자 기억하고 감내해온 일을 떠올리고 말한 친구가 있다면 그 일을 기억나는 그대로 말하게 해주고 들어주는 것이 친구로서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개인마다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장면이 다르고 친구들 사이에 함께 있었던 일을 친구마다 제각각 달리 기억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한 사회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방식도 사회집단과 구성원에 따라 차이 날 수 있다. 우리 국가가 빠르게 발전하여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정치적으로도 민주주의가 점차 성숙해온 지난 세대를 돌이켜 보면 유난히 오래 기억되는 사건들이 많다. 선진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사건이 최근에도 끊이지 않는 데다 정치적·사회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기억하고 배격하는 갈등이 극심하다.
같은 일을 경험하더라도 어떤 일은 더 깊이 그리고 더 오래 기억된다. 우리 사회는 나와는 다른 입장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에 유난히 인색하다. 저마다 처한 위치에 따라 기억하는 일과 말이 다를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우리 사회가 한층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사회적·정치적 갈등이 극심한 작금의 우리 사회가 부디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공감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박순진 대구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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