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직터뷰] 윤재호 구미상공회의소 회장 "정장 입고도 늘 운동화…구미경제 부흥 위해 열심히 뛰어야죠"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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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22 07:58  |  수정 2023-11-29 15:38  |  발행일 2023-03-22 제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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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호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은 "인생에서 맞게 되는 고난은 반드시 이겨낼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기회로 삼는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무릇 기업가는 '긍정의 힘'을 믿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조규덕기자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 주산지리. 지금이야 '관광 핫플'이지만 과거엔 그야말로 '깡촌' 중에 깡촌이었다. 그곳 한 촌가(村家)의 늙은 아버지는 식전 댓바람부터 지게를 지고 쇠꼴을 베러 갔다. 하루도 어김이 없었다. 새벽 이슬 가득 맺힌 쇠꼴을 한 짐 해 온 아버지 모습에 자식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송구한 마음에서다. 그런 아버지를 유달리 안쓰러워한, 철든 자식이 있었다. 의외다. 8남매 가운데 막내아들이다. 소에게 먹일 저녁을 위한 오후 쇠꼴 베기는 온전히 그 아이 몫이었다. 소년은 다짐했다. "훗날 커서 엄마 아부지 호강시켜 주고, 이 집을 일으킬 사람은 나"라고. 그 의지를 놓지 않았던 소년은 어느덧 반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경북 구미 경제를 이끄는 수장이 됐다. 그 주인공은 제15대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인 윤재호(57) 주광정밀<주> 대표이사다. 주광정밀은 연매출 1천억원대를 찍고 있는 국내 '흑연전극 금형가공기술' 분야 강소 기업이다. 휴대폰·자동차 부품 등 흑연 제품 가공에서 남다른 기술력을 갖고 있다. 유럽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최근 구미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만났다. 패기 하나로 달려온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들었다.

빈농 막내아들서 기부왕으로
"어릴 때부터 기계 다루는 재주 남달라
당시 공고생 선망인 대우전자 입사도
배고픔 잘 알기에 창업 후 꾸준히 기부"

발로 뛰는 현장형 상의회장
"반도체 단지·방산클러스터 유치 전념
신공항 연계 고속도로·철도 확충 노력
구미와 경제공동체인 대구 도움 절실"

▶빈농의 8남매 중 막내…'소년 윤재호'의 하루는 어땠나요.

"그 시절 모두가 어려웠지만, 저희 집은 형님 누나들 그리고 저, 입이 몇 개였겠습니까. 늦둥이 막내지만, 힘든 살림에 고생하는 부모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천성적으로 바지런했어요. 봄철 이맘땐, 학교 마치고 오면 책가방 던져 놓고 산에 가서 나물 캐느라 정신없었죠. 광주리에 나물을 가득 담아 오면 엄마가 '책 한 자라도 더 봐야지'라고 꾸중을 하셨을 정도였어요. 물론 속으론 막내아들이 기특했겠지요. 겨울방학 땐 산에 가서 나무하는 게 일과였죠. 그렇게라도 부모님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습니다. 아쉬운 점도 있지요. 친구들과 논 기억이 별로 없어요. 하교 후 운동장에서 '오징어 가생' 놀이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남달랐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좋은 DNA를 물려받은 것 같아요. 아버지가 평생 농사일을 하셨지만, 제 기억엔 무엇이든 뚝딱뚝딱 잘 만드셨어요. 제가 코흘리개 시절 싱거미싱인지, 브라더미싱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낡은 재봉틀을 장난감 삼아 갖고 놀았어요. 그걸 일일이 분해하고 조립하는 데 푹 빠졌죠. 그러다 엄마한테 혼도 많이 났었죠.(웃음) 그런 취미를 갖다 보니 '기계'라는 녀석에 흥미를 갖게 된 것 같아요. 주변에서도 손재주가 있다고 곧잘 칭찬해 줬어요. 사실 그땐 인문계가 뭔지, 실업계가 뭔지도 몰랐죠. 그저 손재주 좀 있다는 막연한 생각에 경북기계공고로 진학하게 됐습니다."

▶'대구 유학' 시절 얘기가 궁금합니다.

"촌에서 올라온 학생들, 저뿐만 아니라 모두 고생했겠지요. 아버지가 부쳐 준 한 달 생활비로 방값·교통비 내고, 실습 기자재까지 사면 4천원가량 남을까 말까였지요. 아침은 언감생심, 점심도 굶을 때가 많았어요. 고육책을 썼지요. 교통비를 아껴 빵을 사 먹었습니다. 대구 달서구에 있던 경북기계공고에서 중구 남산동 자취 집까지 매일 걸어서 귀가했죠. 3시간가량 걷고 또 걷고…. 그래도 그때가 행복했습니다. '기능경기대회'라는 동기 부여가 있었으니까요. 밤늦게까지 학교 실습실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기능대회 학교 대표가 되면 저녁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어요. 라면을 끓이면 선배들이 건더기를 다 건져 먹었어요.(웃음) 남은 국물에 밥만 말아 먹어도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윤 회장은 고교 졸업반 때 대구기능경기대회에서 동메달을 땄다. 전국기능대회 출전권을 쥔 그는 결심을 한다. 그에겐 기능대회보다 빨리 돈을 벌어 집안을 일으키는 게 먼저였다. "전국대회는 후배에게 양보할 테니 취업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담임교사를 졸랐다. 결국 당시 공고생 최고 선망의 직장인 대우전자에 입사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의 대우는 삼성·현대보다도 높게 쳤다. 윤 회장이 구미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때부터다. 8년간의 대우전자 생활을 마감한 뒤 1994년 자본금 2천만원으로 주광정밀을 구미에 차렸다.

▶월급쟁이에서 기업가로…특별한 '경영철학'은.

"한 회사의 대표가 되니 마음가짐부터 달라지더라고요. 매일 어김없이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는 습관부터 길렀죠. '회사를 위해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구상을 위해서죠. 나를 믿고 따라주는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손자병법에 '이환위리(以患爲利)'라는 말이 있어요. 고난은 이겨내는 것이며, 기회로 삼는다는 뜻이죠. 이 말을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제 회사 역시 몇 년 전부터 주력 물량 감소 등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어쩌겠습니까, 긍정의 마음으로 이겨내는 수밖에요. 사업 다각화에 승부를 걸었습니다. 기존 휴대폰·자동차 부품에 이어 반도체·항공기·수소연료전지 등 신산업 쪽으로 투자를 늘려나가는 중입니다. 곧 결실을 볼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부왕'으로도 소문이 나 있습니다.

"배고픔의 한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학창 시절의 기억 때문이지요. 여력이 있을 때 도움을 주자고 다짐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구미 소년소녀가장 20여 명을 해마다 돕고 있으며, 마이스터고 장학재단을 통해 형편이 딱한 기술영재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내친김에 2015년엔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 기부자 모임)'에도 들었습니다. 모교인 경북기계공고엔 꾸준히 장학금을 기탁하고 있습니다. 특히 재작년엔 경북기계공고 다목적공연장 설립 기금으로 20억원을 기부했습니다. 기부를 계속하다 보니 '기부는 내게 주어진 기회이자 기쁨'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상의회장으로서의 어깨도 무거울 텐데요.

"요즘 구미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는 게 느껴지죠? '반도체 특화단지'와 '방산혁신클러스터'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구미로 가져오는 일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들 사업을 따내고 기업 투자를 받기 위해선 무엇보다 'KTX 구미역 신설'이 선행돼야 합니다. 아울러 대구경북신공항 건설과 연계한 고속도로·철도망 확충도 중요합니다. 이는 구미의 힘만으론 만들 수 없습니다. 대구가 힘을 보태줘야 합니다. 저희 회사 부장급 이상 열 명 가운데 일곱이 대구에 주소를 두고 있어요. 이쯤 되면 대구와 구미는 이미 경제공동체입니다. 과거 구미에선 강아지도 1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우스개 얘기가 나돌 정도로 경제가 번성했습니다. 그런 도시 부흥을 위해 국책사업 유치에 온 힘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어떤 '구미상공회의소 회장'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솔직히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세상 이치가 그렇잖습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무리수를 두게 되거든요. 누가 보든 안 보든 열심히 제 할 일을 해야지요. 저는 정장을 입고도 운동화를 신습니다. 젊은 친구들 말로 '덕후'급은 아니지만 집 신발장에 스무 켤레가량 놔두고 있지요.(웃음) '윤재호 저 친구, 열심히 발로 뛴 구미상의회장'이라고만 기억해 주면 좋겠습니다. 운동화 신고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다 구미상공회의소 사무실 곳곳에 나붙어 있는 플래카드 속 슬로건이 눈길을 끌었다. '산업 역군과 기업인이 애국자다.' 기업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전달하는 일에 최우선 가치를 두겠다는 윤 회장의 취임 때 다짐이 변함없이 읽혔다.

△1985년 경북기계공고 졸업 △2012년 기능한국인 제70호 선정 △2014년 구미시 최고장인 선정 △2014년 구미상공대상 수상 △2015년 금오공대 명예공학박사 △2016년 대한민국 명장 선정(컴퓨터응용가공)△2021년 2천만불 수출탑 수상

이창호 논설위원 leec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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