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천이 낳은 인물들

  •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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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14  |  수정 2023-04-14 07:26  |  발행일 2023-04-14 제35면
두 강줄기 길게 뻗은 곳, 성리학 대가 태어나고 임란의병 기개 빛나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천이 낳은 인물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임고서원, 16세기에 지은 영천의 수선서원이며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가 명물이다. 〈영천시청 제공〉

영천에는 원삼국시대 때 만든 청못과 청제비가 있다. 5~6세기경에 이미 수리시설을 만들어 벼농사를 지을 만큼 오곡백과가 풍성했고 두 개의 강줄기가 멀리 길게 뻗어있어 길 영(永)에 내 천(川)을 써 영천이라 했다.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이름나 영천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가 8개나 되고 영양(영천의 옛이름)읍지에 따르면 90여 씨족이 영천 땅에 들어와 문호를 열었으니 마치 씨족박물관 같은 고을이다. 여말의 대학자 포은 정몽주가 외가인 이곳에서 태어났고 노계 박인로가 가사문학을 꽃피웠다. 조양각 앞 천변에는 조선통신사의 마상재 묘기가 아직도 아른거리고 내로라하는 시인묵객은 누마루에 앉아 금호강 풍광을 읊었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천이 낳은 인물들
금호강변의 조양각, 고려 공민왕 때 지은 관루로 임진란에 소실돼 인조때 재건했다. 〈촬영: 사진작가 임병구〉

◆역사 속의 명물 명원루(조양각)

영천의 명물은 금호강 변에 우뚝 선 명원루(明遠樓)이다. 지금은 조양각이라 부르지만 옛 이름은 명원루이다. 천년고을의 객사·관아·성루는 모두 사라졌지만 1363년 공민왕 때 지은 누각만 홀로 남아있다. 임진병화로 불타버린 것을 인조 때 재건하면서 동쪽 아침 햇살이 빛나는 누각, 조양각으로 이름을 바꾼 듯하다. 건축물 이름에 각(閣) 대(臺)는 단층에, 루(樓)는 이층에 붙이는데 북편에는 보면 단층 같아 조양각, 남쪽 강변에서 보면 우뚝 솟은 이층 누각 같아 서세루 현판을 달았다.

명원루를 지을 당시 막 장원급제한 포은 정몽주는 외가인 이곳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멋진 시로 명원루를 찬미했다. "맑은 시내는 석벽을 안고 고을을 돌아 흐르는데/ 새로 지은 누각이 우뚝 서 있으니 눈이 훤히 열리네/ 남쪽 밭의 누른 구름, 곡식 익은 것을 알겠고/ 서산의 맑은 기운, 아침 해가 떠오르네/ 풍류를 즐기는 태수는 2천석 돈을 쓰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술이 3백잔 일세/ 밤은 깊었는데 옥피리를 불어대니/ 높이 뜬 밝은 달과 함께 거닐고 싶구나."


고려충신 정몽주, 외가 영천서 출생
금호강변 명원루서 詩로 고향 찬미

임란 육지전 첫승 '영천성복성전'때
가사문학 대가인 노계 박인로 활약
을사늑약 체결 후 전국 의병봉기땐
정환직-정용기 父子 대일항전 빛나

조지훈 고모 조애영·연극 이병복 등
'만석꾼 이부자 집안' 여성들도 명성



당대 최고의 문장가 서거정이 1478년 쉰여덟 나이에 왕명으로 남도를 순시하면서 진주 촉석루, 안동 영호루, 밀양 영남루, 울산 태화루, 양산 쌍벽루, 김해 연자루를 둘러보고, 이들은 모두 각기 이름을 드러내어 풍광의 빼어남이 명원루와 백중이라고 하면서 영천은 경상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을로 내 고향 대구와 멀지 않다고 했다.

영남7루 중 쌍벽루와 연자루는 허물어져 옛터만 남아있고 남은 영남5루 가운데 서세루(조양각)의 지명도는 뒤처져 있다. 누정의 묘미는 바깥에서 누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누마루에 앉아 멀리 풍광을 음미해야 하는데 출입을 막아 그 맛을 느끼지 못하니 많이 아쉽다. 영남루는 보물 문화재인데도 시민에게 개방돼 있다.

◆영천 의병사에 빛나는 인물들

임진왜란 당시 영천고을의 의병활동은 눈부셨다. 1592년 4월 가토 기요마사가 경주성을 함락시킨 뒤 파죽지세로 영천성을 점거하자 영천 사족들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3개월 만에 읍성을 탈환했다. 이를 영천성 복성(復城)전투라고 하는데 3천560명이 창의정용군으로 참가했고 여러 사료에 승전이 기록돼 있다. 선조 수정실록의 기록이다.

"무관 권응수가 영천의 적을 격파하고 읍성을 회복했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에 주둔한 적과 서로 내응하고 있었다. 영천 사민이 타 지역 의병과 연합하기 위해 경상좌병사 박진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은 별장 권응수를 보내 공격하게 했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정세아·조성·신해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여 박연에서 적병을 격파했고, 영천성을 포위,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고 마침내 성을 수복하여 위세를 떨쳤다. 이로 인해 안동 이남에 주둔한 적이 모두 물러가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됐다. 신녕의 권응수는 통정대부에 올라 방어사가 됐으며, 정대임은 예천군수가 됐다."

이처럼 영천 의병은 전국 최초로 빼앗긴 성을 되찾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노계 박인로는 권응수 진영에서 활약했고 전란이 끝난 뒤 무과에 급제했다. 그 후 삼남체찰사로 내려 온 한음 이덕형을 만나 교유하면서 조홍시가 누항사 등 주옥같은 가사문학을 남겼다.

◆관서부자(關西夫子) 지산 조호익

영천 출신으로 평안도에서 의병 활동을 한 지산 조호익은 특별한 인물이다. 퇴계제자인 지산은 경상도관찰사와 마찰하여 31세에 평안도 강동으로 귀양가서 임진란으로 풀릴 때까지 16년을 귀양살이 했다. 유배지에서 학풍을 진작시켜 후학을 길러냈고 류성룡의 청으로 귀양에서 풀려나자 소모관(召募官·의병모집관리)으로 평안도 사민을 규합하여 행재소를 지키고 평양성 탈환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평안도 중화와 상원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고 성주목사, 정주목사를 지냈다. 그가 학풍을 진작시킨 강동의 청계서원과 성천의 학령서원에 제향됐고 대창의 지산고택이 그의 종택이다. 종택 앞에는 선조 임금이 내렸다고 전해지는 관서부자(관서지방의 스승) 칭호가 새겨진 빗돌이 서 있어 영남성리학을 서북 관서에 심어 준 그의 일생을 말해준다.

◆훼철된 영천서원

영천에는 문중이 많고 유생이 많아 서원과 사우가 도처에 있었다. 34개나 세워져 금호강 유역에 성리학풍을 진작시켰건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다. 영천의 수선(帥先)서원은 임고서원이다.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데 개성의 숭양서원과 비교된다. 임고서원은 포은의 탄생지, 숭양서원은 포은의 옛 집터에 세워졌다. 건립연도는 임고가 20년 빠르고 사액은 숭양이 먼저이다. 임고는 남인계 서원으로, 김상헌·김육 등 서인계 인물이 추향된 숭양보다 관심도가 떨어졌다. 대원군 서원철폐령은 1현인1서원이므로 개성 숭양서원은 존치되고 임고서원은 훼철됐다. 훼철된 영천서원 중 임고서원, 도잠서원(조호익), 용계서원(이맹전), 도계서원(박인로), 횡계서원(정만양·정규양), 귀천서원(권응수) 등 16개 서원이 복원됐다.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천이 낳은 인물들
영천의병장 호수 정세아 종택, 영천 대전리에 있으며 유형문화재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천이 낳은 인물들
영천시 신녕면에 있는 환벽정 천정, 당대 문장가 시판이 빼곡히 걸려있다. 〈출처: 향토문화대전〉

◆영천을 이끈 반촌 집안

수많은 씨족이 모여 사는 영천에는 어느 집안이 고을을 이끌고 있었을까? 조선후기 조정으로부터 외면받았던 영남유림이 사도세자 신원(伸寃)을 내세우며 나라를 향해 한목소리를 냈던 1792년 1차 영남만인소에 영천유림도 참가했다. 영남 220여 문중의 만여 유생이 참가한 만인소에 영천유림에서는 여덟 문중이 이름을 올렸다. 영일정(정세아) 창녕조(조호익) 영천윤(윤긍) 전주이(이형상) 광주안(안증) 벽진이(이맹전) 영천이(이대영) 안동권(권응수) 집안이다. 당시 남인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므로 반드시 영천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영남이 어려울 때 동참했고 문중인 이름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다시 이백 년이 지난 오늘날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영천을 빛내는 고택과 정자는 대부분 이들 문중 건물이다. 대전리 호수종택, 자양의 매산종택, 임고의 연정고택은 영일정씨 고택이고, 대창의 지산종택, 금호의 만취당고택은 창녕조씨 고택이다. 금호강변의 호연정은 왕손으로 영천에 뿌리를 내린 제주목사 병와 이형상 고택이다(본보 레전드제주목사편 참조). 선비의 쉼터인 정자는 자양의 강호정과 삼휴정, 도남의 완귀정, 횡계의 옥간정, 신녕의 환벽정이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산남의진(山南義陣)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의병 지도자는 의병 활동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왕의 밀지를 받고자 했다. 중추원 관리로 있던 영천 출신 정환직은 고종으로부터 의병 봉기의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에게 고향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한다. 정용기는 1906년 3월 산남의진을 결성하여 의병장이 되고 신돌석과 연합 작전을 펼치는 등 일본군과 싸우다가 이듬해 9월 포항 입암 전투에서 전사한다. 아들을 대신해 산남의진 제2대 대장에 취임한 정환직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고 진영을 정비하여 본격적으로 대일 항전을 전개한다. 정환직 부대는 청하·흥해·신녕·의흥·영덕 등지에서 분파소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고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는 1907년 11월 청하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돼 조양각 아래 둔치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만석꾼 이부자 집안

[이도국의 영남좌도 역사산책] 영천이 낳은 인물들
이도국 (여행작가·역사연구가)

영남 만석꾼 집안으로 경주 최부자. 청송 심부자와 더불어 영천 이부자 집안이 있었다. 임고 매호리의 영천이씨 이낙운 이기모 이인석 3대가 19세기 백년 만에 만석의 재산을 일구었다. 이인석 대에 이르러 자손도 번창해 '벼슬만석 재물만석 아들만석'이라고 불렀다. 장남 목당 이활은 인촌 김성수와 사돈을 맺고 해방 후 고려대학교 설립 시 금호들 옥답 천이백마지기를 출연하여 민족사학 건립에 일조했으며 4남 이호는 법무·내무장관을 지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 때 매호리 99칸 종택 송호장은 불에 타 지금은 집터만 남아있다.

이 집안 여성으로 근·현대 문화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 있는데 이인석의 셋째 며느리 은촌 조애영(1911~2000)과 둘째아들 이홍의 큰딸 이병복(1927~2017) 교수이다. 조애영은 조지훈의 고모로 영양 주실마을에서 영천 송호장으로 시집와 내방가사와 시조 수십 편을 남긴 현대 가사문학의 선구자이고 이병복교수는 예술원회원으로 이화여대에 봉직하면서 우리나라 무대미술 1세대를 개척한 연극계의 전설 같은 인물이다.

이렇듯 역사 속의 옛사람들은 금호강 노을 속으로 사라지고 조양각의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미래세대가 기다려지는 영천이다.

여행작가·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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