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1] 호국 역사의 시작

  • 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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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4-12  |  수정 2023-04-12 07:40  |  발행일 2023-04-12 제12면
삼국 요충이자 항몽·항일 중심…산성마다 수천년 역사 오롯이

[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1] 호국 역사의 시작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위치한 견훤산성. 견훤이 쌓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체성 축조기법이 모두 관찰돼 대부분의 학자들은 축성 연대를 삼국시대로 추정한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상주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호국(護國)'이다.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징으로
상주는 수천 년간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맡아왔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었고
삼국통일의 전초기지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몽골과 왜군의 침략에 맞서 싸운
격전지였다.
상주의 역사가 곧
호국의 역사인 셈이다.
여전히 상주는
시대와 지역의 경계를 넘어
호국의 신념을 올곧게 이어 오고 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격주로
'저력 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경북 상주 땅에 19개의 산성이 있다. 외형상 산성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소수라 할지라도 그 진위는 논쟁거리가 아니다. 산성들은 현 상주 시가지를 중심으로 네 방위에 각각 분포하고, 각 방위에서 분기하는 교통로를 따라 종적으로 배치되어 방사상의 분포양상을 보여준다. 마치 상주를 꽁꽁 묶어 놓고 매듭마다 병사를 세워 지키는 듯하다. 상주는 우리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현재 상주의 나들목은 서울 다음으로 많은 6개에 이른다. 길목은 평시에는 물자와 사람이 넘나드는 교통의 요지가 되고 전시에는 군사적 요충이 된다. 그래서 길목을, 나라를 지켜내려는 굳은 의지로 옛사람들은 저 많은 산성을 쌓았던 것이다.

견훤산성
영남-중부 군사·교통 요지 위치
신라가 한강진출 교두보 삼은 城
백제 견훤이 보수해 사용하기도

금돌산성
고려 승병들 몽골 크게 물리친 곳
임란 땐 상주 의병들 은신처 역할


[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1] 호국 역사의 시작
상주 백화산 호국의 길을 걷다보면 물결치는 구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마주한다.

◆견훤산성

상주의 서북쪽 끝은 화북면이다. 백두대간 화령을 기준으로 북편에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는 충북 보은, 동쪽으로는 경북 문경과 접한다. 면의 왼편으로는 속리산의 준봉이 줄줄이 뻗어 내리고 오른편으로는 도장산, 청화산, 대야산이 이어지는 골짜기다. 청화산과 속리산의 중간, 해발 545m의 장바위산 정상부에 후백제의 맹주 견훤(甄萱)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견훤산성이 있다.

성의 입구는 남동쪽에 위치한다. 좌우로 이어지는 외벽이 견고하다. 돌들은 직사각형의 화강석으로 손으로 다듬은 흔적이 있다. 두께가 10㎝ 내외인 크고 작은 돌들이 정연히 쌓여 있고 잔돌 끼움도 보인다. 엄청난 공력이다. 성안 둘레길을 따라가면 물을 모으는 시설인 집수지(集水池)와 물이 빠져나가는 배수구(排水口)도 볼 수 있다. 망대에 오르면 화북면 일대의 교통로가 한눈이다. 동북쪽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백두대간의 청화산이다. 산 아래쪽에 보이는 고개는 충북 괴산으로 통하는 늘재다. 동남쪽으로 화북면 소재지인 용유동이 훤하다. 용유동 동쪽으로는 용유계곡과 쌍룡계곡의 가파른 벼랑이 문경으로 향한다. 남쪽으로는 갈령 넘어 상주로 이어진다. 과거 경상도 상주와 문경에서 괴산, 보은, 청주 등 충청도로 가는 길은 현재 49번 도로가 가장 수월했다고 한다. 견훤산성은 이 도로의 길목에 위치한다. 중부지방과 영남지방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것이다.

견훤산성을 견훤이 쌓았다는 기록은 없다. 정확한 축성 시기도 알 수 없다. 견훤산성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체성 축조기법이 모두 보인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는 이 성의 축성 연대를 삼국시대로 추정하고 있고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이자 방어처로 축성한 것으로 짐작한다. 다만 견훤이 이 산성을 보축하여 한때 사용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오래전 영웅들의 시대 한가운데 견훤산성이 있었다. 채주환이라는 이는 견훤산성을 이렇게 노래했다. '가을날 옛 성 마루 흰 구름 가니/ 한 세상 영웅들의 간 곳이 어디메뇨/ 백제의 흥망성쇠 천 년의 한이/ 늦은 산 초동들의 한 가닥 노래로세.'

[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1] 호국 역사의 시작
보현사 입구에는 고려시대 몽골군을 크게 물리친 역사를 기리기 위한 '항몽대첩비'가 세워져 있다.

◆백화산 호국의 길과 금돌산성

상주의 남서 모서리, 구수천(龜水川) 물길 위로 백화산(白華山)이 전함처럼 솟아 있다. 산은 경북 상주와 충북 영동을 경계 지으며 한강 이남의 정중앙을 힘차게 내달린다. 그 근육질의 어깨에 신라시대의 석성인 금돌산성(今突山城)이 있다. 금돌산성은 백화산성, 상주산성, 보문성, 금돌성이라고도 부른다. 산성이 자리 잡은 백화산은 백제와 끊임없이 대치하던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학계에서는 상주의 지리에 밝았던 김유신이 치밀하게 계획하여 금돌산성을 삼국통일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성곽 내부에 있는 대궐 터는 서기 660년, 태종무열왕이 백제와의 마지막 일전을 위해 황산벌로 떠나는 김유신을 배웅하던 지휘소였다고 한다. 이후 무열왕은 금돌산성에서 백제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고려시대 금돌산성은 몽골의 6차 침입 때인 1254년 10월, 승려 홍지(洪之)의 지휘 아래 상주의 백성과 승병들이 칭기즈칸의 후예인 자랄타이(車羅大)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기도 하다. 백화산 정상인 한성봉(漢城峰)은 전투에서 크게 패한 자랄타이가 물러가며 '한을 남긴 성과 봉우리'라는 한성봉(恨城峰)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고려가 망했을 때는 이 골짜기에서 고려의 악공이 울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에 맞서 일어선 상주지역 수많은 의병이 이 산에 은신했다. 1천년의 시간을 거치며 호국의 현장으로 숭앙되던 백화산은 일제강점기, 그 이름이 지도상에서 지워졌고 한성봉은 포성봉(捕城峰)으로 바뀌었다.

2007년, 백화산은 이름을 되찾았다. 이듬해 봉우리 한성봉의 이름도 되찾았다. 백화산 등산로의 기점이 되는 작은 절집 보현사 입구에는 '항몽대첩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2012년 구수천 여덟 여울을 더듬어 옛길을 열었다. '백화산 호국의 길'이다. 백화산 호국의 길은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壽峯里) 옥동서원(玉洞書院)에서 영동과 경계가 되는 반야사 옛터까지 구수천 물길 따라 5.1㎞ 이어진다. 구수천은 백화산 자락을 적시며 굽이굽이 비경을 풀어놓는데 그것을 구수천 8탄(八灘)이라 한다. 물길과 나란히 사람의 길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었던 시간이 1천여 년, 그래서 지금도 천년 옛길이라 불린다. 곳곳에 오래된 이름들이 남아 있다. 몽골군이 방성통곡하며 퇴각했다는 '방성재', 홍지의 군사에게 유인된 몽골군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저승골', 매복해 있던 승병들이 몽골군에게 다시 한번 일격을 가했다는 '전투갱변' 등 대개가 호국의 격전을 기억하는 이름들이다. 호국의 길이 끝나는 반야사 옛터의 서쪽 봉우리는 백화산 주행봉(舟行峰)이다. 이름 그대로 큰 군함이 힘차게 달리는 모습이다. 산은 그 기세를 잃은 적 없고 사람들은 그 시간을 잊은 적 없다.

◆병풍산 병풍산성

상주 시내 동남쪽에 병풍산(屛風山)이 솟아 있다. 산의 동쪽 산록은 낙동강과 맞닿아 있다. 북쪽에는 병성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합류한다. 천 너머는 사벌국면의 너른 들이다. 병풍산 서쪽으로는 25번 국도가 지나간다. 옛 영남대로다. 또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국도와 교차한다. 두 길이 만나는 지점에 상주IC가 자리한다. 봉우리는 두 개다. 정상은 해발 365.6m로 서쪽에서 상주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그보다 낮은 봉우리는 294.8m로 동쪽에서 낙동강과 강 너머 중동면의 너른 들판을 조망한다. 두 산봉우리 사이에는 북쪽으로 물을 내려보내는 큰 골짜기가 있고 이를 에워싼 오래된 성이 있다. 병풍산성이다. 내륙 간 수운과 육상 교통로가 교차하는 행정 및 군사적 요충지이자 경작지와 산계, 수계가 모두 조망되는 천혜의 요새가 바로 병풍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런 기록이 있다. "사벌국 고성은 병풍산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이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사벌국의 왕릉이라 한다." 사벌국은 삼한시대 현재의 사벌국면에 존재했던 소국이다. 3세기에 신라에 복속되었지만 5세기 전반에도 토착 세력이 유지되는 가운데 신라의 중앙과 교류했다. '사벌국 고성'이라 전해지는 병풍산성은 언제 누가 축조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벌주 대군 박언창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분명치 않고, 사벌국의 중심세력이나 삼국시대 상주지역의 유지세력에 의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가 병풍산성에 웅거하며 박언창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918년 아자개는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했다. 그때 그가 머물던 곳이 병풍산성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병풍산성은 아자개성으로도 불린다. 병풍산 일대의 사벌국 거점은 7~8세기경에 지금의 상주시가지 일대로 옮겨갔다고 여겨진다. '해동지도'에는 수문장처럼 상주목 읍치의 수구처를 지키는 병풍산이 묘사되어 있다.

상주는 고려 8목 중 하나였다.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소재한 행정의 중심이었다. 상주는 삼국시대 이래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로 영남 북서부의 중심지 기능을 담당했고 국난 때마다 전세를 역전시킨 격전지였다. 육군전사에 국가를 지켜낸 결정적 사례가 가장 많이 실려 있는 곳이 또한 상주라고 한다. 상주에 산재해 있는 옛 산성들이 1천년 수호의 역사를 말해준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 =상주시 누리집. 상주읍지. 한국지명유래집. 한국콘텐츠진흥원 누리집. 문화재청 누리집. 한기문, 상주의 역사와 백화산, 2001. 윤용혁, 고려대몽항쟁사연구, 일지사, 1991. 정영호, 김유신의 백제 공격로 연구, 1972. 백영종, 5~6세기 신라산성 연구 : 소백산맥 북부 일원을 중심으로, 2008. 전옥연, 병풍산고분군의 정비와 활용방안, 2012. 세종문화재연구원, 상주 견훤산성 지표조사보고서. 2012. 세종문화재연구원, 상주의 산성 정밀지표조사, 2021.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상주 병성동·헌신동고분군, 2001. 경북도문화재연구원, 상주 병성동고분군, 2001. 상주박물관, 상주 병풍산고분군 지표조사 보고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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