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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릴랜드주 포트미드에 자리 잡은 국가안보국(NSA) 본부. 각국의 신호정보(SIGINT)를 취합해 미국 정부와 군부에 제공해온 정보의 산실이다. 연합뉴스 |
상상력이 뻗친다. "한국 국정원, 미국 정부 불법 감청…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 지원 관련" 4월8일 영남일보에 심상찮은 1면 머리기사 제목이 떴다. "영남일보는 국정원이 4월26일 한국 방문을 앞둔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의 백악관 안보 보좌관들을 감청해 온 사실을 폭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한 미국 백악관과 국방부 내부 논의를 감청한 국정원의 신호정보 보고(Signal Intelligence Report)가 박힌 특급 비밀 문건이 게이머들의 채팅 프로그램인 디스코드를 거쳐 소셜미디어 텔레그램과 트위터를 통해 대량 유포된 것으로 밝혀졌다."
으레 이건 초현실이다. 벌어질 수 없는 저세상 일쯤으로 보면 된다. 그래도, 그래도 만약 이런 일이 터졌다면? 즉각 조 바이든은 한국 국빈 방문을 접고 백악관은 모든 외교 관계를 중단한 채 최고단위 응징 계획을 밝힐 게 뻔하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지체 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용산은 뒤집혀 아수라가 될 테고.
한데, 여기 '영남일보' 보도에서 미국 조 바이든 대신 대한민국 윤석열을 집어넣고 국정원 대신 중앙정보국(CIA)으로 바꾸면 현실이 되고 만다. 이게 지난 8일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내용 그대로다. 미국 정보국이 대한민국 심장인 용산 대통령실을 맘껏 도청해 왔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현실에선 바이든이 사과를 한다거나 백악관이 뒤집혔다는 소식이 없다. 기껏 법무부가 나서 비밀 문건 유출자를 찾아내겠다며 으르렁대는 게 다다. 이자들한테는 동맹국 대통령실 도청쯤이야 일상이고 오로지 문건 유출이 문제라는 뜻이다. 이게 대한민국 정부가 동맹, 동맹 외치며 신줏단지처럼 떠받들어온 미국의 정체다.
미국 국빈 방문을 떠들어대며 난리 치던 대한민국 대통령실은 더 가관이다. "한국 감청 정황 보도 관련 미국과 필요한 협의 하겠다." 달려들어 삿대질해도 모자랄 판에 협의라니! 범죄자와 뭘 어떻게 무슨 협의를 하겠다고? 여긴 범죄자와 협의 따위나 하는 검사실이 아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이다. 그 흔해 빠진 항의 성명서 한 장 못 날리는 판에 협의랍시고 미국한테 말이나 제대로 한 번 붙여볼 수 있겠는가. 제기랄, 이게 독립 국가이긴 한지!
보라. 2013년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동맹국 지도자들 전화를 도청해 온 사실이 드러났을 때 독일 총리 메르켈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한테 직접 전화를 걸어 조목조목 따지지 않던가. 그즈음 프랑스 정부는 미국이 자국 국민을 대상으로 무차별 정보 수집을 했다며 유럽연합 정상회의에서 긴급 현안으로 올려 거세게 대들지 않던가. 이게 정상적인 국가고 정부다. 동맹과 범죄를 구분할 줄 안다는 뜻이다. 미국한테 대들 자신도 없고 외교도 모른다면 남들 따라 하고 흉내라도 내란 말이다. 협의 같은 당치도 않은 말이나 내뱉지 말고.
미국이 저질러온 도청은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1970년대 주한미군 철수 건으로 미국과 티격난 박정희 정부가 로비스트 박동선을 앞세워 미국 의원과 공직자를 돈으로 매수한 사건도 중앙정보국의 청와대 도청으로 드러났다. 그게 1976년 이른바 '코리아게이트'였다. 그 시절 중앙정보국은 고성능 전파탐지기로 청와대 유리창 떨림을 통해 대화나 타이핑을 도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로도 미국이 청와대와 고위 공직자를 도청해온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미국의 도청과 감청 기술이 더 정교해져 드러나지 않았을 뿐.
청와대만도 아니다. 2008년엔 미국 국가안보국이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을 비롯한 동맹국 지도자를 도청한 데 이어 2013년엔 국가안보국이 주미 한국대사관을 비롯한 38개국 대사관을 도청한 사실을 위키리크스가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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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연합뉴스 |
한데, 대한민국 정부는 청와대가 털렸든 대사관이 짜드락났든 외교관 전화가 따였던 미국을 향해 입도 뻥긋 못했다. 드러난 것만 따져도 그 굴종의 세월이 47년이다. 그게 이번 대통령실 도청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대통령실이 미국의 도청에 항의할 용기마저 없다면 미리 방어책이라도 세웠어야 옳았다는 말이다. 그나마 보안성이 나은 지하 벙커를 지닌 청와대를 두고 담장 너머 미군기지, 그것도 미국이 도청과 감청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정보분석센터를 차린 용산으로 부랴부랴 대통령실을 옮길 때부터 사달 났다. 지난해 급조한 대통령실을 놓고 전문가들뿐 아니라 국회에서도 여야 국방위원 모두가 도·감청 문제를 경고하지 않았던가.
"범이 날고기 먹을 줄 모르랴" 이럴 때 쓰는 말이다. 미국이 대한민국 대통령실을 도청하리란 것쯤은 반세기 경험을 통해 동네 박 서방도 뻔히 아는 사실이다. 대통령과 그 언저리가 몰랐다면 치명적인 직무유기고, 알고도 두루뭉술 넘겼다면 나라 심장을 넘겨준 반역이다.
"신호정보(SIGINT)는 통신과 정보 시스템에서 외국 정보를 수집하고 정부의 고위 관리와 군에 제공한다. 그이들은 정보를 이용해 아군을 보호하고, 동맹국을 지원하고, 테러리즘과 싸우고, 국제 범죄와 마약과 싸우고, 외교 협상을 지원하면서 숱한 국가 목표를 달성한다."
이건 미국 국가안보국이 웹사이트에 버젓이 올려둔 문구로 대한민국 대통령실 도청의 출처인 바로 그 신호정보를 가리킨다. 한마디로 미국은 대놓고 온 세상을 도청하고 감청한다는 말이다. 무슨 비밀도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대통령실은 눈 감고 있었던 꼴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 누구도 미국이 저지른 이번 대통령실 도청사건 내막을 알 길이 없다. 통신 케이블로 접근했는지 레이저 전파 탐지기로 창과 건물을 쑤셨는지 사이버로 침투했는지. 이도 저도 아니면 중앙정보국이 신호정보를 출처로 박았지만 대통령실 내부에서 새 나간 인간정보(Humint)일지도 모른다. 다만, 하나 또렷한 게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실뿐 아니라 정부와 군부를 비롯한 모든 기관과 그 지휘부가 도청당해 온 것만큼은 틀림없다.
그동안 미국은 중앙정보국, 국가안보국, 국방정보국(DIA)을 비롯한 열여덟 개 정보조직을 움직이며 온 세상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았다. 게다가 미국은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와 함께 이른바 '다섯 눈깔'(Five Eyes)로 지구 전역의 통신과 전파를 도·감청해 왔다. 그게 1946년 영미안보협정(UKUSA)에서 비롯되었으니 전지구적 신호정보 감시체계가 이미 77년째다. 이 다섯에 덴마크,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이 붙어 이제 '열넷 눈깔'(Fourteen Eyes)로 불어났다. 으레 그 모든 신호정보는 미국이 취합하고 분석하고 활용해 왔다. 석기시대로 되돌아가지 않는 한 정부든 단체든 개인이든 도청과 감청을 피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간 큰 대통령실은 "이전 때 보안 완벽 준비"니 "청와대보다 용산이 보안 탄탄"이니 "한미동맹 흔들려는 특정 세력 의도적 개입"이니 따위로 도청 사건의 본질 감추기에 안간힘만. 미국 정부한테는 따지고 대한민국 시민한테는 사과부터 하는 게 대통령 윤석열이 외쳐온 정상이고 상식 아니겠는가.
시민이 묻는다. 대통령실이 털린 마당에 국빈 방문이라고? 속살까지 다 들킨 판에 대통령 윤석열은 그쪽 바이든 앞에서 밥이 넘어가고 웃는 얼굴로 사진이나 찍을 수 있을는지. 간도 쓸개도 다 빼놓고 가지 않는 다음에야.
시민은 미래를 외치며 일본한테 엎어진 대통령도, 동맹을 외치며 미국한테 수그린 대통령도 바란 적이 없다. 시민은 오로지 독립국가 체면을 세워줄 옹골찬 대통령을 원할 뿐이다.
도청, 불법이다. 국제 범죄다. 그게 미국이든 동맹이든 누구든 마찬가지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모를 리 없다. 시민이 지켜본다. 대통령이 대답할 때다.
〈국제분쟁 전문기자·방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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