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과 책상 사이] 마침내 다시 오월

  •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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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5-01  |  수정 2023-05-01 07:51  |  발행일 2023-05-01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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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계절의 여왕 오월이다. 자연의 모든 것이 빛나고 어떤 것도 거슬리지 않는다. 바람은 포근하고,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지만 시리지 않다. 직사의 햇살도 가리고 싶지 않고, 바늘 같은 솔잎조차 아가의 살결처럼 부드럽다. 오월은 감사와 축복의 달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 코로나 때문에 지난 세 번의 오월은 제대로 향유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맘껏 풀밭을 뛰어다니지 못했고, 놀이공원에도 가기 어려웠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에도 그립고 고마운 사람과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웠다. 비대면의 시간은 한없이 힘들었지만, 가정의 소중함과 혈육의 정을 절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어느 분이 올해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을 다 불러 같이 식사하고 예전에 자주 불렀던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하고 싶어 식구 수대로 악보를 복사해 두었다고 했다.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작사한 존 하워드 페인은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이스트 햄프턴에서 태어났다. 그는 13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객지를 떠돌면서도 항상 고향 오두막집에서의 추억을 되새기며 유년의 따뜻한 보금자리를 그리워했다. 30대에 파리에서 살 때 그는 혹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어느 추운 겨울날 길을 가다가 거실에 둘러앉아 있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불 켜진 창 커튼 사이로 보았다. 그는 나도 저런 가정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의 울컥한 기분이 '아무리 초라해도 내 집만 한 곳은 없다'는 가사를 쓰게 했다. 작곡은 영국의 헨리 비숍이 했다. 비숍은 기사 작위를 받았고 옥스퍼드대학 교수로 페인과는 대비되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페인은 평생 가족도 없이 떠돌다가 아프리카 튀니스의 어느 후미진 길거리에서 고독하게 객사했다. 사후 31년이 지나 미국 정부는 "내게 돌아갈 가정은 없지만 고향 공동묘지에라도 묻히게 해주오"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본국으로 운구했다. 대통령과 상원의원을 비롯해 수많은 시민이 나와 그의 귀환을 환영하며 조의를 표했다. 죽어서야 아늑한 잠자리를 구한 그의 묘에는 '아름다운 노래로 미국을 건강한 나라로 만들어 주신 존 하워드 페인. 편안히 잠드소서'라고 적혀 있다. 링컨 대통령 부부가 특히 이 곡을 좋아했다. 대통령 아들이 11세 나이에 열병으로 죽자, 이 곡을 반복해 연주해 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버지니아주 레파하녹크 리버 전투에서 북부연합군 1만2천명, 남부 연합군 5천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양 진영은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낮엔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지만, 밤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매일 음악회가 열렸다. 어느 날 밤 북군군악대가 '성조기의 노래'를 연주하자, 남군군악대는 '딕시의 노래'로 대응했다. 이어 북군 연합밴드가 '즐거운 나의 집'을 연주했다.

특히 한 병사의 하모니카 연주가 지치고 불안한 병사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밤의 대기를 타고 강 건너 남군 병사들에게도 그 애절한 멜로디가 전달됐다. 이윽고 남군군악대도 같은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양 진영 군인들은 막사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남북군 병사들은 강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다가가 함께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즐거운 나의 집'을 합창했다. 서로 증오하며 싸우던 그들은 가족과 고향을 그리워하며 또 평화와 사랑을 갈구하면서 24시간 휴전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종군기자 프랭크 막심이 "모두 미쳤다"고 외쳤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즐거운 나의 집'이 유행하자 엄마들은 아들이 무사히 귀환하길 바라며 'Home Sweet Home'을 자수로 새겨 아들 방에 걸어 놓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분쟁 지역과 전쟁터에 아들과 남편을 보낸 부모와 아내의 마음 역시 같을 것이다. 드니프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병사들이 강으로 뛰어들어 서로 얼싸안고 합창하게 하는 노래는 없을까.

가정은 완전히 긴장을 풀고 모든 부담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처이자 세상 살아갈 힘을 주는 에너지 공급원이다. 가족이 도란도란 둘러앉은 식탁에서는 바깥세상의 위선과 가식, 허세는 사라지며 큰 사람은 작아지고 작은 사람은 커지게 된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칠흑 같은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가장 먼저 마중 나와 주고, 가장 멀리까지 배웅해 주는 사람, 그게 가족이다. 모처럼 맞는 온전한 오월이다. 모든 가정에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길 빌어본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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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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