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직터뷰] 김기호 W아너소사이어티 대구 대표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세상에 꼭 필요한 일에 쓰이길 바라"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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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7-05 08:59  |  수정 2023-11-29 15:36  |  발행일 2023-07-05 제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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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봉사를 실천할수록 즐겁고 행복하다는 김기호 W아너소사이어티 대구 대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고도 누구보다 충만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세계 최고 '기부왕'은 투자 귀재인 워런 버핏(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미국 경영전문지 포브스에 따르면 버핏이 지난해까지 의료·빈곤 퇴치 등 기금으로 쾌척한 돈은 무려 63조6천억원이다. 소규모 국가의 한 해 예산보다 많다. 쉽게 상상이 안 되는 금액이다. 버핏의 순자산이 131조원쯤 되니 단순히 계산하면 지금까지 전 재산의 절반가량을 기부한 것이다. 버핏의 뒤를 이어 2위(47조원4천억원)에 랭크된 빌 게이츠를 비롯해 세계적인 부호들의 재산 대비 기부 수준도 엇비슷하다. 우리나라 역시 고액 기부자들이 많지만, 대부분 기업인이나 자산가들이다. 그렇다고 기부가 부자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평범한 우리 이웃 중에서도 베풂을 운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은 진정한 '기부 천사'도 있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감동과 울림을 주는 건 선행의 크기가 아니라 그 마음이리라.

헬렌 켈러는 "가장 큰 부자는 가장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많이 나누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 말대로라면 대구에서 손꼽히는 부자는 단연 김기호 W(여성)아너소사이어티 대구 대표다. 김 대표는 2013년 10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그 전 해 작고한 남편 박찬수(예비역 육군 준장)씨도 나중에 가입시켰다. 대구에서 처음으로 고인(故人) 및 가족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것. 부부의 가입비 2억원은 김 대표가 평생을 모은 노후자금이었다. 김 대표는 "우리가 떠날 때 작은 돈이라도 남으면 베풀고 떠나자고 했던 남편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했다. 부창부수의 나눔정신이다.

김 대표의 기부 목록에는 지금 살고 있는 집도 포함돼 있다. 이른바 유산기부다. 그것도 모자라 최근에는 영남대병원에 시신 기증 서약까지 했다. 정말 남기는 것 하나 없이 남에게 다 내어주는 것. "왜 그렇게까지 하시느냐"는 우문에 돌아온 대답은 단순명료했다. "즐겁고 행복하니까요!" 김 대표에게 행복한 일은 기부만이 아니다. 새마을단체 등을 통한 봉사활동에도 바쁘다. 누가 황혼을 쓸쓸하다고 했나. 편견일 뿐이다. 김 대표의 노년은 나눔과 비움으로 더 충만해지는 듯하다. 지난달 26일 김 대표를 만나 그의 나눔인생 스토리를 들어봤다.

기부는 먼저 간 남편과의 약속
대구 첫 고인·가족 아너소사이어티 회원
"생전에 '떠날 때 남김없이 베풀자' 다짐
끝내 못 간 크루즈여행비는 장학금 기탁
아껴 쓰며 모아둔 노후자금 2억도 기부"

'나눔의 빛'으로 더 충만한 황혼
'유산 기부' 이어 최근 시신 기증 서약
다양한 단체 직책 맡아 봉사도 이어가
"나눔은 실천할수록 즐겁고 행복해져
더 많은 사람이 그 기쁨을 알게 되길"

▶나눔DNA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일까요.

"그런 듯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큰 사랑을 받고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제 이름을 남자처럼 지은 건 귀한 딸이 행여나 일찍 죽을까 봐 그랬다네요. 그 시절에는 라디오가 무척 귀했어요. 동네에서 유일하게 라디오가 있던 우리 집은 신기한 방송을 들으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였습니다. 그리고 걸인들도 참 많이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그들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어요. 먹을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매일 보면서 나눔은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인 것이죠."

▶대구에 정착하신 계기와 생활은 어떠셨는지.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6·25 전쟁이 터졌어요. 그때는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1·4후퇴 때 피란을 왔던 게 대구와의 첫 인연이었죠. 전쟁이 끝난 후 서울로 돌아가 살다가 다시 대구에 내려오게 된 건 군인 남편 때문이었어요. 제가 23세에 결혼하고 보니 남편의 근무지 이동이 무척 잦았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지치기도 하고 아이들(1남 1녀) 교육 문제도 있어서 남편 근무지와 상관없이 저는 대구에 정착했습니다. 그 이후로 못다 한 공부도 조금씩 하면서 사회활동에도 차츰 발을 들였어요. 1980년대 초에는 국공립어린이집인 새마을협동유아원 원장을 맡았습니다. 처음엔 무보수 봉사였습니다. 당시 그 어린이집은 남구 대명동에 있었는데, 한 마디로 텅 빈 시설이었어요. 피아노를 비롯한 필요한 물품을 자비로 구입했습니다. 20년 동안 운영했네요. 그 외에 다른 봉사단체들과도 인연이 닿아 활동한 덕분에 새마을훈장(근면장), 대구시민상, 남구 구민상 등 과분한 상도 받았어요."

▶생각나는 기부활동과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계기는.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때 성금 500만원을 냈던 게 기억나네요. 그 외에도 여유가 되는 대로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어요. 그러다 2012년 남편이 갑자기 급성 폐렴으로 생을 마감하자 너무 고통스러워 인생이 허망했습니다. 돈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과 함께 크루즈 여행을 하려고 모았던 돈 2천만원을 남구청에 장학금으로 기부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가 떠날 때 남김없이 베풀자"던 남편과의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모르게 생활비를 아껴 저축한 노후자금 2억원을 기부하려 했는데, 구청에선 받을 수 없다며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 열매)에 기부를 주선해 줬어요. 우리 부부가 아너소사이어티에 동시에 가입하지 않은 덴 이유가 있어요. 저는 대구에서 여성 1호, 전체 13호로 먼저 가입했지만, 1929년생인 남편은 대구 29호로 가입시키려고 미뤘던 거죠. 지금 생각해 보면 괜한 짓 같은데, 남편과의 추억을 하나라도 잊어버리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대구의 '나눔 전도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제 주변 사람들에게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권유를 많이 했습니다. 우리 동네 살던 정휘진 경동기업 대표는 2015년에 가족까지 5명이 가입했어요. 이외에도 여러 기업인, 친지 등을 합치면 10명 넘게 가입시킨 것 같네요. 저는 늘 아너소사이어티 홍보에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사랑의 열매' 배지를 달고 다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죽을 때까지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물론 내 몸도 세상에 꼭 필요한 곳에 쓰이길 바랍니다."

▶본인의 나눔철학과 사회에 하고 싶은 말은.

"우리 부부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습니다. 요즘 말로 'BMW'(버스·지하철·걷기)족이었지만, 불편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부와 봉사는 특별히 마음 먹었다기보다 남편과 제 생각이 비슷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노후 자금 전액을 기부한다고 하자 주변에서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하지만 남편의 유족 연금으로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해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막상 기부하고 보니 마음이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리고 내 아이들이 적극 지지해 준 것도 큰 힘이 됐어요. 며느리까지도 "어머님, 참 잘하셨어요!"라며 응원해줘 고마웠어요. 사실 남에게 베푸는 일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 더 큰 기쁨이 생긴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여성이 가진 섬세함과 따뜻함이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사회를 행복하게 하는 데 큰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김 대표는 바쁘게 산다. W아너소사이어티 외에도 젊은 시절부터 발을 들인 여러 단체에서 여전히 활동 중이다. 대구시새마을회 이사, 새마을문고중앙회 이사, 일하는 여성연합회 부회장, 남구민주평화통일 위원 등 맡고 있는 직책도 다양하다. 봉사나 외부 활동이 없는 날에는 취미로 배운 국궁을 연습하거나 등산을 간다. 구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친다. 김 대표는 인터뷰가 끝난 뒤 필자에게 LED양초를 건넸다. 만나는 사람에게 나눠주는 선물이라고 했다. 문득 김 대표야말로 나눔의 빛으로 우리 사회를 밝히는 양초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게 가능한 건 가진 재산이 아닌 충만한 사랑일 게다. 소설가 앙드레 지드의 말처럼 '나눔은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니까.

허석윤 논설위원 hsyoon@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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