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직터뷰] 이신근 대한검도회 이사 (8단 교사) "무수한 우승 트로피보다 사람을 남겼다는 것이 가장 뿌듯해"

  • 장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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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8-16 06:32  |  수정 2023-11-29 15:44  |  발행일 2023-08-16 제25면

이신근
이신근 이사가 우승 트로피와 상패 등이 가득한 구미시청 검도선수단 훈련장 사무실에서 검도의 장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장준영 논설위원

'수파리(守破離)'. 불교용어이기도 하지만 무도를 수행할 때 곧잘 쓰이는 말이기도 하다. '수(守)'는 '가르침을 지킨다'라는 의미다. 원칙과 기본을 충실하게 익히는 단계를 뜻한다. '파(破)'는 원칙과 기본을 바탕으로 그 틀을 깨고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 수련의 마지막 단계로 불리는 '리(離)'는 파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모든 면에서 법을 잃지 않고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경지에 이름을 뜻한다. 이 모든 게 자신과의 싸움이다. 특히 무도에서는 더욱 그렇다.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 다른 지름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내와 땀이 맺은 결실의 크기에 따라 단(段)이나 급(級) 등이 부여돼 수련자의 수준을 짐작게 한다. 선수 및 지도자 생활을 거치며 검도 인생 50년을 살아온 이신근(65·전 구미시청 감독) 대한검도회 이사 역시 정상급 수준인 '8단 교사' 칭호를 받았지만 여전히 '리(離)'를 향해 가고 있다.

◆외로움이 항상 그를 담금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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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 어떤 사회에서든 1기·1회·창단·초대 등 '처음'이 주는 기대감과 부담감은 공존하기 마련이다. 백지상태에서 뭔가를 이룩할 때마다 멋진 역사가 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반면,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거나 따가운 시선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처음'은 동전의 양면 같다. 선배나 전임자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상대적으로 쉽게 걸어갈 수 있는 찬스는 원천적으로 없다. 또 책임감과 사명감은 더욱 크기에 대부분 평균 이상의 노력과 희생을 요구받기 일쑤다.

이신근 이사의 삶도 어찌 보면 '처음'의 연속이었다.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검도를 처음 접한 중학교 때는 팀이 창단됐다. 검도부 1기로 고교를 다녔고 실업팀도 창단멤버로 뛰었으며 지도자 생활도 창단팀 감독을 맡아 시작했다. 당연히 외로웠다. 노하우를 전수해주거나 이끌어줄 선배가 없는 엄연한 현실은 선수시절이든, 지도자 생활이든 대개 생존과 맞닿아 있었다. 이런 여건과 일련의 과정들은 끊임없이 그를 담금질하게 했고 대과 없이 현역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이 이사의 검도 입문 과정은 꽤 평범했고 1973년 경주문화중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체육 선생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일부 수업에 빠질 수 있는, 당시 또래 사이에서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도 한몫을 했다. 죽도를 들고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당초 없었던 흥미가 생겨났고 익숙해질수록 의욕과 오기가 생겼다. 때마침 창단된 검도부 1기가 됐고 처음 출전한 경북도내 대회에서 2위에 올라 가능성도 발견했다. 인천체고 1기로 진학해서 주장을 맡았고 1983년 풍산금속 검도실업팀 창단멤버로 입단, 팀이 해체될 때까지 12년 가까이 선수생활 및 지원업무를 담당했다.

 지도자로 꽃피운 검도 인생 
22년간 구미시청 검도단 감독 맡아
200여회 수상 전무후무한 기록 일궈
학교~실업팀 잇는 육성 인프라 개척
입단 때까지 우승 인연 없던 선수도
정상급으로 길러내며 황금기 이끌어

 이젠 무대 뒤 '離를 향한 정진' 
"제가 받은 과분한 사랑 되갚을 시간
미력하나마 후배들과 검도발전 위해
은퇴 후에도 할 수 있는 일 찾아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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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열린 제16회 세계검도선수권대회에서 단체 준우승을 차지한 뒤 이신근 이사와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신근 이사 제공〉

◆3대가 체육인… 지도자로 빛을 발하다

이 이사는 이태원(작고) 전 경북체고 교장·김청자(89) 여사의 장남이다. 이 전 교장은 경북대 사대 체육과 출신으로 경북도교육청 체육과장 등을 지냈으며 체육행정에 적잖은 업적을 남겼다. 또 이 이사의 아들 주섭(30)씨는 문화중·고와 대구대 검도부 출신으로 검도 5단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대거 출전하는 단별선수권대회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한 것으로 유명한 3단부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흔치 않은 3대 체육인 집안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 이사는 선수시절보다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실업검도연맹에서는 이 이사가 일궈낸 실적을 두고 '아마 전무후무할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2000년 구미시청 검도선수단 창단에 이어 2001년부터 감독직을 수행하면서 2022년 퇴임 때까지 쌓은 수상경력이 200회를 훌쩍 넘기 때문이다. 그를 거쳐 간 제자들의 활약 또한 그를 빛나게 했다. 현재 구미시청 검도단을 이끌고 있는 이강호(7단 교사) 감독이 대표적이다. 2001년 대학졸업 후 첫 실업팀 생활을 구미시청에서 시작, 22년간의 선수생활을 한 팀에서 마무리하고 소속팀의 지휘봉을 물려받은 한국 검도계의 정상급 실력자다.

이 이사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제자들의 노력과 구미시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 그리고 부인 류명이(60)씨의 내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경주 출신인 류씨는 교육공무원으로 이 이사와는 중매로 만났다. 선을 보는 자리에서 류씨는 "열심히 살 자신이 있다"는 다소 뜻밖의 말을 했고 이 이사는 그 말에 감동을 받아 가정을 꾸리게 됐다고 들려줬다. 직업특성상 대회나 연수 및 훈련이 잦아 집을 비우는 경우가 허다했지만 단 한 번도 불만이나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고마움은 안정감으로 이어졌고 팀 운영과 제자 육성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결국은 상장과 상패보다 사람이 남더라

선수생활을 하면서 우승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했던 이 이사는 팀을 맡은 지 2년 만인 2003년 제7회 전국실업검도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하면서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 거의 매년 국가대표를 배출하면서 구미시청은 자타가 공인하는 검도명가의 반열에 올랐다. 구미시청 검도선수단 훈련장 한 편에는 그동안 수상한 우승컵 및 우승기와 상장·상패 등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다.

그는 선수들을 선발할 때 기량보다 인성과 가능성을 우선시한다. 오기와 뚝심까지 엿보인다면 최우선 고려대상이다. 신뢰와 마음을 주면 의리가 생긴다는 믿음도 강하다. 누구나 검도를 대하는 가치관은 다르지만 서로 신뢰하고 배려하는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이 이사의 지론이다. 그리고 정정당당한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에 상당한 애착을 갖고 있다. 실제로 구미시청 검도팀에는 중·고 및 대학시절 정상과 인연을 맺지 못한 선수들 가운데 실업팀에서 기량을 만개한 경우가 많다. 기본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수(守)'를 무한 반복하다시피 하면서 '파(破)'의 길로 접어들게끔 하는 것이 이 이사의 역할이자 책무다. 제자의 성장이 가르치는 재미로 이어지고 그 재미가 또다시 수련의 에너지로 환원되는 선순환이 계속되면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셈이다.

은퇴를 고민하던 무렵, 그는 희한한 상황에서 결심을 하게 된다. 지난해 10월 제22회 봉림기 전국실업검도대회에서 구미시청이 정상에 오른 직후 제자들의 우승 헹가래 당시 몸이 공중에 뜬 순간 '이제 물려주고 내려 와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더라는 것이다. 다소 느닷없는 결정이었지만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이 이사는 그해 12월 검도계 인사들과 제자 및 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은퇴식을 갖고 22년간의 지도자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죽도를 잡은 지 50년. 예의범절과 인격 수양을 강조하는 검도인으로 살면서 검도 불모지였던 구미에 중·고·대학·실업팀으로 이어지는 인프라를 구축한 것에 남다른 자부심을 느낀다는 그는 2021년 '자랑스러운 구미사람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형외과 의사이기도 한 윤성용 한국실업검도연맹회장(6단)은 최근 SNS를 통해 이 이사를 두고 '한국실업검도계의 전설'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결코 제가 잘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그리고 가족들이 큰 힘이 됐습니다. 이젠 갚아야 할 시간입니다. 우승기도, 트로피도 소중하지만 결국은 사람을 남겼다는 사실이 가장 뿌듯합니다. 실업팀에서는 드물게 매년 개최되는 OB·YB모임도 연장 선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미력하나마 검도발전과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작정입니다".

장준영 논설위원 changc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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