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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서, 1943년 10월25일에 75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고려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이곳에서 고려극장의 수위를 지냈지요. 국경을 넘나들며 '나는 홍범도'라 불렸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지도자였던 그의 말년이었습니다. 2019년에 서울시립예술단이 공연을 할 때, '극장 앞 독립군'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였어요.
하지만 기개를 잃지 않았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이 침략하자 참전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퇴역군인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했어요. 그러자 "나는 지금 늙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은이들! 모두 무기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고 고려인들을 독려했습니다.
그를 쫓던 일제조차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서, 부하들로부터 하느님과 같은 숭배를 받는다"고 인정했지요. 그는 언제나 계급장도 없는 일개 졸병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지휘도나 권총을 차지 않았고, 봉오동 전투에서 획득한 장총 두 자루를 휴대하고 다닌 현장 지휘관이었습니다.
'범도'를 발표한 방현석 소설가는, 홍범도가 대한민국의 첫 군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1월 대일선전포고를 했으며, '대한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했어요. 따라서 봉오동전투는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수행한 최초의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 홍범도가 당시 발표한 유고문에도 그 점을 명시하고 있었어요.
9월13일에 국내 역사학계를 망라한 51개 단체들은 이렇게 입장을 표명했어요. 1) 자유시 참변 당시 홍범도는 유혈 사태를 우려했고 무장해제에 가담하지 않았다. 2) 홍범도가 이끈 빨치산 부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독립전쟁의 주역이었다. 3)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는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
심지어 국방부 직속 군사편찬연구소조차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에 대해 "그가 직접 가담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고 강조했어요. 사실 그는 소련공산당에 가입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환갑이 다 되어 1927년에 비로소 입당을 했습니다. 그의 항일무장투쟁은 이념과 전혀 관계없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더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에 속해 있었습니다. 누가 그 당시에 광복이후에 한반도가 분단될지를 예측할 수 있습니까? 대한민국의 순국선열 기준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자'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는 이념과 관계없이 서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사실 현지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상징이자 구심점인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이 최고의 예우를 하겠다고 하니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이었어요. 그들은 지금, "어떻게 독립영웅인 우리 장군님에게 대한민국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쓴 이동순 시인은 '내가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을 왔네/ 나, 지금 당장 보내주게'라고 그의 심경을 대변했어요.
"진정 그대들은 목숨 걸고 이 나라를 일구게 한 선조 선배들의 큰 뜻을 헤아려나 보았는가?" 그를 직접 모셔왔던 조진웅 배우의 질문입니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보수라면,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던' 분이, 이렇게 모욕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지요.상명대 역사콘텐츠 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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