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이로 시인의 신작

  • 한이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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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27 07:48  |  수정 2023-12-12 10:17  |  발행일 2023-10-27 제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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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병사의 역할입니다

희뿌연 전운을 헤치고 전장으로 몰려드는 아침들
군장 대신 백팩을 멘 처진 어깨마다 컴컴한 어제의 냄새가 납니다

지상의 언어와 매일 마주하지만 낯설어지는 건 지상의 세계입니다
날이 갈수록
지하의 문법에 능통하는 중입니다

소년은 마지막 전술입니다

먼저 자신과 싸우기 위해선
입이 열리지 않는 투구를 써야 합니다
눈을 부릅뜨고 두 눈을 감아야 합니다

붉어진 얼굴은 분장으로 은폐합니다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입에 물고
침묵을 움켜쥔 빈주먹으로
낯선 웃음이 난무하는 시간 속으로 뛰어듭니다

전투 중에 거울 속의 병사와 마주치면
혼자 붉게 물든 초경의 밤처럼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습니다

이 무대에서 대역이란 없습니다
누구도 이토록 사적인 통증을 웃음으로 바꿔 주진 않습니다
눈물에도 계급이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되면
말아 올린 머리에게 삭발은 차라리 선망입니다

좀 더 늦게 들어온 병사가 가장 위험합니다
가장 빨리 돌아온 병사가 좀 더 견딜 만합니다
살아 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이란 얘기가 들립니다

소년은 어제처럼
사방에서 날아든 시선에 만신창이가 된 핏빛 저녁을 쏟아내며
하루분의 배역을 구해냅니다

소년을 벗고

문제집 뒤편의 정답을 찾아보던 것처럼
달력을 뒤적입니다

토르소

눈 감을 때마다
빛이 잘린다

절망의 공포
절망의 폭력

그 끝은
주름이 사라진 커튼
죽음이 사라진 모든 것과의 절연

가까스로
절망스러울 뿐
절망을 완성하지 않는다

쓰레기통엔
봉지째 버려진 음식물 그리고
부패된 날짜가 있다

세월의 중력을 견디다 보면
굳은살처럼
감각을 잊은 근육이 붙고

나이라고 명명된
시간의 배설물 위로 맴도는
어둠의 날개

자꾸 어두워서
눈을 깜박인다

절반의 망각
절반의 욕망

출구를 더듬던 어제는 잊혀져 가고
탈출이라는 단어가 지워진 사전을 베고서
눈 감으면
눈먼 꿈에서 풀려날까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은 넘쳐흐르는데
기어이
조여지지 않는 밤의 마개

흰 창살 같은 슬픔의 뼈대 사이로
결박당한 사지가 보인다

발끝이 닿지 않는 어떤 수심처럼
검고 아득한
몸으로

마침내
사지로부터 달아난
몸통으로

그렇게라도
사는

장마

여름철 여러 날을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현상*이 들었다

열흘이 지나도록 선풍기로부터 밀려오는 음습한 파도가 빨래처럼 방 안에 널려있었다 바닥으로 고꾸라진 파도는 신문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번번이 주저앉고 말았다 사방으로 흩어진 신문지의 검은 활자들이 벽을 기어올라 곰팡이의 검푸른 말을 받아 적었다 구석에 틀어박힌 걸레 밑에선 아직 문장을 이루지 못한 곰팡이의 말들이 망아지처럼 날뛰었다 방 안을 맴도는 파도가 읽어 내리는 벽의 문장은 빗소리에 씻겨 수챗구멍을 메웠다 열흘이 지나도록 계속되는 중얼거림이 방 안의 모든 감각을 가물게 했다 내내

내 안의 축축하게 메말라 가는 방을 내가 들여다보고 있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인용

곰 인형

엄마가 형을 낳은 건 내가 네 살 되던 해였습니다 아빠를 잃은 지 다섯 해가 지나 엄마는 형을 만드느라 밤마다 혼자 끙끙대며 두 손을 떨곤 했습니다 장난감처럼 생긴 형은 태어나자마자 첫울음 대신 부르르 머리를 진동하였습니다 형의 타고난 에티켓을 본 할머닌 훌륭한 서비스맨이 될 거라며 흐릿한 밥상을 닦으셨습니다

엄마가 형을 때린 건 형이 두 살 되던 해였습니다 형이 동굴 속 곰털처럼 떠다니는 엄마의 자욱한 말들을 씹어 배를 불리곤 했던 탓입니다 형의 새까만 눈은 밤낮없이 찌릿찌릿, 엄마의 인형공장은 누수된 신음을 닦듯 방문을 걸어 닫듯 소리 없이 바르르 떨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문틈 사이로 알싸한 마늘 냄새가 진동하였습니다

엄마가 형을 형으로 봉한 건 내가 열 살 되던 해였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해 온 엄마가 아버지를 대신해 온 형에게 내려준 서열입니다 우리 집 기둥,은 할머니가 형을 부르는 소리이자 쓸개 빠진 소리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지만 감히 내가 형을 대신할 순 없는 노릇

엄마가 형을 밥상에 앉히기 시작한 건 형이 헛기침을 하던 해였습니다 물론 나의 내력을 키운 팔 할은 형이지만…… 차라리 곰상곰상한 아빠 한 명 들이자는 나의 청은 할머니에게 번번이 묵살되곤 하였습니다

엄마가 나오자 할머니가 들어가고 할머니가 들어가자 엄마도 들어가고 등 터진 형은 새우처럼 등이 굽고 이제 형은 형이 아닌가 싶고 이러나저러나 형은 말이 없고 집은 멀쩡한데 자꾸만 집안은 기울어 가고

오늘도 곰 발바닥처럼 부르튼 엄마의 인형공장을 눈물로 훔치며 곰곰 생각해도 감감한 나의 고민, 곰인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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