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전하는 장기복역수 시인의 메시지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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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27 07:45  |  수정 2023-10-27 08:02  |  발행일 2023-10-27 제11면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한이로 시인, 신작 발표하며 본격 창작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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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각 한이로/2023 영남일보 문학상(신춘문예) 당선

달팽이가 나를 구속하는 사실을 달팽이가 내게 구속당하는 사실보다 더 자주 잊고 있다

달팽이는 앞머리에 달린 구닥다리 내비 안테나를 생짜로 발기시켜 허공에 치근대야 미혹한 신호가 감지되어 하물하물 전진한다 지구의 온몸을 구석구석 핥아 온 애무적 행보다

생래적이라 해서 혐의가 벗겨지진 않는다

달팽이에게 싱싱한 조서 한 장 던져주면 질깃한 줄기까지 꼼꼼히 다 읽고 시퍼런 답변을 싸 놓는다

달팽이의 은밀한 이빨은 오독오독 질문 읽는 소리로 입증된다 난독일지언정 달팽이는 묻는 족족 부인하지 않기에 달팽이의 변은 원색적이다

토마토를 꼬치꼬치 캐묻는 날이면 붉은 혈변을 물증으로 제시하고 찐 옥수수를 추궁하는 날엔 내장까지 하얗게 질려 달팽이의 항문은 말문이 막힌다

달팽이는 주도면밀해서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없다 다만 발자국을 지운 자국이 남아 결벽이 증명된다

최종 성적 판결은 자웅동체, 변태가 변태를 낳아 온 거다

모든 의혹이 사라지면 달팽이는 딱딱한 살 속으로 말랑한 뼈를 돌돌돌 휘감아 박제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숙면한다 잠버릇처럼 무지갯빛 코딱지로 궁둥이에 뚫린 하나뿐인 콧구멍을 은폐한다

잠든 지 오래될수록 오래 흔들어야 깨어난다 그때 달팽이가 나를 흔든다는 사실도 깨어난다

가까스로 달팽이로부터 내가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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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문청들은 지독한 열병을 앓습니다. 그 지독하고 가혹한 열병은 불면의 밤으로 이어지며 갖은 진통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견뎌냅니다. 썼다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며 등단의 꿈을 키웁니다. 문단의 등용문이 다양해졌지만, 여전히 전국의 신문사들이 주최하는 신춘문예는 뜨겁습니다. '당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고도'처럼 아득하지만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신춘문예입니다.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영남일보도 오늘 신춘문예 공지를 띄웠습니다. 숙제하듯 공지를 띄우며 열병처럼 지나간 이름 하나를 떠올립니다.

'한이로'

그는 교도소 장기복역 중에 2023 영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전국적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단 한 번뿐이었습니다. 지난해 말, 30분의 짧은 접견시간, 철창을 사이에 둔 채 마주했던 그는,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뚜렷합니다. 그날 그는 "햇볕이 드는 곳을 자주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움켜쥐어도 끝내 잡히지 않는 햇살'이었지만, "열리지 않는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시(詩)는 독백에 가깝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그가 툭 던진 '독백'이라는 말은 꽤 묵직했습니다. '혼자 묻고 답하는 시'를 쓰며 그는 '그만의 고해성사'를 했던 것입니다. '독백'은 애절하고 쓸쓸했지만, 세상과의 연을 이어가고 싶은 그의 '고해성사'는 그렇게 한 줄의 시가 되어 창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시인 한이로. 그가 영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후 신작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에 나섰습니다. 올해 들어 시 전문지 3곳에 신작 14편을 발표했습니다. 대구에서 발행하는 '시와반시' 2023년 여름호에는 '소년병' '주저흔' '당신의 고래' 등 10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시와 반시는 '신작 소시집'이라는 타이틀로 한 시인의 작품을 특집으로 다뤘습니다. 시 전문지 아토포스 2023 여름호 '2023 신춘문예 시 당선자 특집'에도 '곰 인형' '면경' 등 2편의 시를 발표했습니다. 또 시 전문 계간지 '詩로 여는 세상' 2023 가을호에는 '탈각' '장마' 등 2편의 시가 실렸습니다.

작품과 함께 시와 반시에 실린 '시인의 말'을 읽으면서 사뭇 그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저 너머의 시간을 바라보며, 걸으며 견뎌내는' 시인 한이로의 모습 말입니다.

"바람 분다. 세탁기에서 빨래를 꺼낸다. 운동화의 끈을 풀어 여민 옷깃을 연다. 끈을 쥐고 있으면 저 끝에 무언가 매달려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지런히 벽에 기대어 볕을 쬐는 운동화. 빨랫줄에 널린 바람은 젖은 바지를 입고 맨발로 기나긴 허공을 온종일 걷고 있다"(시와 반시 '시인의 말' 중)

신춘문예의 계절이 다가옵니다. 뜨거운 축제를 앞두고 영남일보는 한이로 시인이 발표한 14편의 시 중에서 주요 작품의 전문을 게재합니다. 작품마다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는 시인 한이로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햇볕이 드는 곳을 자주 바라본다'던 그가 행간과 행간 사이에서 그려지기도 합니다. 장기복역수가 아닌 어엿한 시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한이로 시인, 그가 세상에 전하는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길 바랍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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