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물속에 두고 온 귀…투명한 언어로 빚어놓은 일상적 삶의 진실

  • 백승운
  • |
  • 입력 2024-01-12 07:57  |  수정 2024-01-12 08:00  |  발행일 2024-01-12 제16면
박기영·안도현·장정일과
'국시' 동인으로 문단 첫발
유년기 청력 상실 기억 등
47편에 인생의 신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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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시집 '물속에 두고 온 귀'를 펴낸 박상봉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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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봉 지음/ 모악/112쪽/1만원

1981년 박기영·안도현·장정일 시인과 함께 '국시' 동인으로 문단 활동 시작한 박상봉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첫 시집 '카페 물땡땡'과 두 번째 시집 '불탄 나무의 속삭임'보다 더욱 고요하고 투명하고 선명해진 작품세계를 보여준다. 투명한 언어로 빚어놓은 일상적 삶의 진실을 곳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시집이다. 그 비밀스러운 세계가 보여주는 신비로운 모습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번 시집의 핵심 이미지는 '귀'다. 귀는 세상의 울림을 포착하고, 그 울림을 인간 내면으로 증폭해내는 감각기관이다. 그 과정에서 귀는 세상의 울림을 존재의 떨림으로 수용해낸다. 박 시인의 시는 그런 울림과 떨림의 파장에 관한 고백과도 같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됐다. 시인이 일상에서 매 순간 마주하는 삶의 모습을 47편의 시로 담아냈다.

1부의 시들은 유년기에 잃어버린 '귀(청력)'를 향해 있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아득하고 막막한 시공간에 놓인 어떤 존재와 '내'가 어떻게 소통하고 이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시는 존재와 존재를 연결하는 작은 창문이 된다.

"아이들이 물에 잠겼다고 한다/ 물에 잠긴 세월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 귀는 아이들 곁을 떠나지 못해/ 저 바다 깊은 물속에 산다//(중략)// 바다 깊은 물 속에 두고 온 귀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데// 물에 잠긴 귀가 듣는 소리는/ 아이들 우는 소리만 들린다"-'물에 잠긴다는 것'부문.

시인의 시는 세상과 인간 사이에 보이지 않는 파장의 화음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고, 시를 통해 그 비밀을 엿보고 알아차리고 깨닫는 기쁨이 만만치 않다.

2부 이후의 시에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과 그곳에 깃든 또 다른 세상을 표현해낸다. "빗속에서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리고 / 젖은 발목이 더 젖어 슬프기도 한 여름"('여름비')은 너무나 투명해서 오히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투명함 속에서 "물 밑으로 가라앉은 숫자들은 / 저녁이 되면 별이 되어 떠오"('알츠하이머의 집')르고, 이렇게 떠오른 별은 시인의 손끝에서 시로 다시 태어난다. 그 별은 시인의 내면 깊숙이 잠재되어 있던 유년의 기억이다.

이번 시집에 담긴 시들은 "시절이 다 가도록 다시 꽃피지 않는 집 앞의 사랑나무/ 어둠으로 뒤덮인 마을과 길을 잇는 불빛 아래에서"('유년시첩') 꼭꼭 눌러 적은 간절하고 뜨거운 시인의 고백록이기도 하다.

"집을 짓는다 나는 주소를 모른다 꽃밭을 만든다 (중략) 결별한 어제를 빨아들이고 시냇물을 빨아들이고 싸리꽃 흙길을 빨아들이고 혓바늘 돋는 문장의 거친 호흡으로"-'태양 속 아이들' 부문.

시인은 잃어버린 시절의 기억으로 집을 짓고 "결별한 어제"를 "혓바늘 돋는 문장의 거친 호흡으로" 뜨겁게 받아 적었다. 내면에서 오랫동안 "갈 길을 잃어 불안한 꿈들이/ 혈관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비수를 / 꺼내어 들고 찾아가는 곳"('물의 나라로')이 바로 이번 시집에 깃든 세계다.

정호승 시인은 "박상봉 시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떨린다. 마치 내가 몰래 훔쳐보고 싶었던 연인의 일기장을 엿보는 듯하다. 그의 시에는 삶의 비밀이 숨겨져 있어 그 비밀을 엿보고 알아차리고 깨닫는 기쁨은 크다. 그의 시는 일상적 삶의 진실에서 나온다. 일상의 상처와 희망에 깊게 뿌리를 내린 그의 시는 인생의 신비에 가 닿아 있다"고 평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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