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롱빈의 시간…그들의 몸·기억 속에서 그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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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16 08:21  |  수정 2024-02-18 17:05  |  발행일 2024-02-16 제16면
롱빈 여정서 맞닥뜨린 50년전 민간인 학살 참상
한 남자의 베트남전 기억 담은 정의연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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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연 작가의 '롱빈의 시간'은 베트남 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학살을 다룬 장편 소설이다.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남자가 50년 동안 죄의식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민낯을 전한다. 사진은 기사와 관련없음. <게티이미지뱅크>
롱빈_표지
정의연 지음/ 나무와숲/288쪽/1만5천원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전쟁 속에서 난무하는 폭력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이기도 한 남자가 50년 동안 죄의식으로 새긴 고통의 기억을 생생하게 담았다. 현재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관련 국가배상소송에서 1심은 승소했지만 한국 정부의 항소로 2심 재판이 진행되고 있어 그 의미가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소설은 베트남어학과 대학원생인 '이나'가 시급이 꽤 높은 알바 자리를 소개받고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이나는 휠체어를 탄 노인 '구자성'을 만나 구술 기록 계약을 맺는다. '죽기 전에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려 한다'는 구자성이 제시하는 계약 조건은 다소 황당하고 부담스럽다. 죽지 않는 한 중간에 그만둘 수 없고, 만일 그만두면 지불한 돈의 10배를 물어야 한다. 또 구술한 내용을 절대 외부에 발설하지 말고 동남아 여행에도 동행해야 한다.

까다로운 조건이었지만 이나는 구술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구자성은 아무 이유 없이 종종 입을 닫기 일쑤여서 일은 좀체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나는 구자성이라는 결코 쉽게 만날 수 없는 캐릭터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기도 하다. 구자성은 한때 돈을 많이 번 이야기, 결혼 사흘 만에 파경을 맞은 이야기, 그 뒤로 여러 여자를 만났다는 이야기 등을 토막토막 들려준다. 그러던 중 3주가 지나도록 입을 떼지 못한다. 인내심이 바닥나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이나가 그만두겠다고 통보하러 간 날, 구자성은 베트남 여행을 제안하며 추가 계약서를 내놓는다.

그렇게 떠난 베트남 여행에서 이나는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구자성이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다는 것. 다낭에 와서도 좀체 입을 열지 않던 그가 열흘째 되던 날, 호출한 택시 기사에게 "롱빈을 아시오?"라고 묻는다. 50년 전 한국군이 잠시 주둔했던 곳이라는 말에 이나는 그제야 구자성이 왜 베트남에 오자고 했는지 알게 된다.

소설은 이때부터 롱빈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진실과 마주한다. 구자성의 의식과 무의식 밑바닥에 똬리를 틀고 앉아 그를 평생 괴롭혀 온 죄의식과 고통의 뿌리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최소한의 도덕과 양심이 전쟁의 광기로 인해 어떻게 무너지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한 사람의 몸과 영혼을 어떻게 갉아먹는지를 선연하게 보여준다.

저자 정의연은 작가의 말에서 "이번 작품을 쓰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했다"고 한다. 특히 한국군 참전군인들을 만나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진 마을에 직접 찾아가 여전히 깨지고 무너진 마음을 추스르며 생을 붙들고 있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도 그 시간을 살고 있다. 그들의 몸 안에서는 전쟁이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다"고 밝힌다.

정의연은 2004년 소설동인무크 '뒷북' 창간호에 '다락방과 나비' '풀벌레의 집'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그 여자를 보았네', 2009년 '그와 함께 산다는 것' 등을 발표했다. 2015년 작품집 '스캔'을 출간했으며, 2020년 '그 여자'가 제12회 현진건문학상 추천작에 선정됐다. 2022년 베트남전 참전군인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를 그린 단편 '그가 아직 살아있는 이유'를 발표했다.


백승운기자 swbac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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