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모두 잘 지내시죠?"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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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7 08:02  |  수정 2024-03-27 08:03  |  발행일 2024-03-27 제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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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늦잠을 자려 했지만, 스피커가 아파트 관리소 직원의 투박한 말투를 뿜어냈다. 아파트 후문에서 장터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편한 차림에 롱패딩을 걸치고 나섰다. 싱싱한 먹거리 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엘리베이터를 빨리 잡으려고 시린 발을 얼른 슬리퍼에 감추었다.

경비아저씨는 겨울바람이 밤새 후려치듯 구석구석 몰아넣은 낙엽을 쓰느라 땀까지 흘리셨다. 아파트 옆 공원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쉼터이자 통원버스를 기다리는 유치원생들의 놀이터였다. 오늘도 그네를 먼저 타겠다며 깔깔대는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할머니는 손녀의 통원버스가 다가오자 엉덩이를 '툭툭' 털며 급히 일어나셨다. 순간 할머니는 어지러운 듯 넘어지지 않으려고 내 팔을 얼른 움켜잡았다. 놀라는 내 신경세포보다 손이 더 빠르게 할머니를 부축했다. 그런 할머니가 안중에 없는 손녀는 선생님 품으로 달려가 버스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선생님은 단순한 현기증으로 판단했는지 버스를 출발시켰고, 할머니는 떠나는 버스 안의 손녀를 향해 책임을 다하듯 손 흔들며 배웅했다.

그때까지도 할머니는 내 팔에 의지한 채 어지러움을 견디고 있었다. 철렁거린 심장을 쓰다듬으며 "할매요, 개안은교?" "아이고, 개안타가 요새 이카네. 새댁요, 고맙십니데이."

아침마다 손녀를 배웅해주는데, 최근 이석증이 심해져 주저앉거나 넘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차가운 벤치에 패딩을 벗어 자리를 데우고 할머니와 나란히 앉았다. 병원부터 다녀오는 것이 좋겠다는 말에 공감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일어나 가셨다.

점점 멀어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니 얼마 전 넘어지셨다던 아빠가 생각났다. 아빠의 손바닥에 앉은 두꺼운 상처 딱지가 오늘따라 유난히 선명하다. 아빠는 파킨슨병으로 흐물흐물해지는 근육과 기억을 두려워하면서 매일 걷기를 하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넘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넋두리를 하신다. 그때, 한걸음에 달려가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아빠가 좋아하는 자장면 데이트를 했었다.

오전 강의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자동차 시동을 걸자 김윤아의 'going home' 노래가 흘렀다. '나는 너의 일을 떠올리며 수많은 생각에 슬퍼진다.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아 초조해져.' 가끔 발이 꼬여 자신도 모르게 넘어지는 아빠 생각에, 어지러워 넘어진 할머니 생각에, 손에서 놓친 비닐봉지 속의 뭉개진 바나나. 오늘따라 마음이 저리다. 그리고 초조하다. 아직 누군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이유겠지. "할매요, 개안치요?"
이향숙<(사)산학연구원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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