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 ② 칸의 도시, 에르덴조 사원 흔적서 만나다

  •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 |
  • 입력 2024-05-10 08:34  |  수정 2024-05-10 08:35  |  발행일 2024-05-10 제17면

20230713_172923
에르덴조 사원의 본당 세 건물. 왼쪽부터 차례로 주운 조, 걸 조, 바론 조.

카라코룸은 19~20세기 러시아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시작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출토된 유물 가운데 상당수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예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부는 몽골 국립역사박물관에 있고, 또 최근에 문을 연 카라코룸 박물관에 중요 유물들을 상당수 전시하고 있지만 도시의 전반적인 실체를 가늠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하다.

원래 칭기즈칸 시대의 제국 중심은 헤를렌(Kherulen)강 상류였다. 그보다 훨씬 서쪽인 이곳 카라코룸에 수도를 정한 것은 그의 둘째 아들이자 제2대 칸인 우구데이이다. '원사(元史)'에 의하면, 1235년 봄 우구데이는 오늘날의 카라코룸 부근에 있는 '달란다비스(일흔 고개)'에서 쿠릴타이(khuriltai: 몽골 황실 大會)를 열어서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고, 1년 만에 '만안궁(萬安宮)'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돌거북 비석에는 흥원각비(興元閣碑)에 대한 설명과 함께 칭기즈칸 15년(1220)에 도읍을 카라코룸에 정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칭기즈칸의 유지를 우구데이가 받들어 카라코룸을 건설한 것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카라코룸에 관한 기록은 앞서 언급한 카르피니와 루브룩의 여행기 외에도 '원사', 주와이니의 '세계 정복자의 역사',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라시드 앗 딘의 '집사(集史)' 등 여러 문헌이 있다. 하지만 내용이 단편적이어서 역시 실체를 밝히기에는 충분치 않다.

그러나 최근에 카라코룸에 관한 연구가 꽤 진척되었다. 몽골국립대 엔크 바야르 교수는 VR, XR를 활용하는 디지털 헤리티지로 카라코룸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그의 연구실에 초청을 받아 함께 세미나를 하면서 꽤 오랫동안 그의 작업 과정과 성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지난 1월에 그의 작업을 중심으로 JTV 전주방송의 '테마스페셜: 카라코룸, 디지털로 복원되다-Virtual Karakorum'이 방영되었다.


30년 번영 후 사라져버린 카라코룸
성터 허문 자리에 세워진 에르덴조

1586년 건립 몽골 최초 라마교사원
카라코룸 성벽의 석조 가져다 지어
1000여명 승려·300여채 게르로 번성
거대한 성같은 규모 당시 영화 짐작



엔크 바야르 교수가 '버추얼 카라코룸'으로 복원한 도성은 남북 2.5㎞, 동서 1.5㎞의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맨 앞에는 대칸의 정문이 있다. 그리고 그 문을 들어서면 64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길이 120m, 폭 80m의 만안궁이 우뚝하게 서 있다. 그 속에서 잡극 공연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로를 따라 상점이 늘어서 있고, 다양한 옷차림의 수많은 사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광활한 초원 한가운데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가상세계 속에서 되살아났다.

VR 안경을 벗으면 다시 황량한 초원뿐 어디에서도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30여 년간 번영을 누렸던 카라코룸이 저물기 시작한 시기는 쿠빌라이가 중국 전역을 차지하고 원나라를 건국하면서부터다. 그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면서 카라코룸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원나라가 존속할 때까지는 그나마 도시로서의 명맥을 보존했지만, 14세기 후반 원나라가 붕괴하면서 카라코룸도 서서히 폐허로 변하면서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성벽과 궁전은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도시를 대신하듯 주변에 '에르덴조'라는 라마교 사원만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이 사원을 통해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의 영화를 대신 반추했다. 에르덴조 사원은 카라코룸의 뼈에 사원의 살을 입힌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원을 건설할 때 카라코룸 성벽의 석조를 가져다 지었다는 것이다. '에르덴조'는 '100개의 보석'이라는 의미란다. 카라코룸의 뼈대를 입혔으니, 보석이라 부를 만하다. 이 사원은 몽골 최초의 라마교 사원이다. 1586년에 이곳을 다스리던 아브라이잔 칸이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몽골에서 비롯되었다. 16세기 후반 북원(北元)의 알탄 칸은 티베트 불교 겔루파의 수장이었던 소남갸초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이름을 하사한 것이 '달라이 라마'이다. 몽골어로 달라이는 '큰 바다', 라마는 '영적인 스승'이므로 '큰 바다 같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이때부터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20230713_173000
바론 조의 석가모니불. 입적 당시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티베트 불교는 13세기에 이미 몽골에 들어왔으나 본격적으로 세를 확장하게 된 것은 이 에르덴조 사원이 건축된 이후부터이다. 티베트 불교는 이 사원을 근거지로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특히 원나라가 패망하고 북원 지역으로 돌아온 몽골 지배층이 결속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구심점으로 티베트 불교를 활용했던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몽골에서 칭기즈칸 다음으로 존경받는 인물인 자나바자르도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할하몽골 아브타이칸의 손자였던 자나바자르는 1649년 14세의 나이로 2년간 티베트로 불교 유학을 가서 달라이 라마로부터 '젭춘담바 후툭투(Jebtsundamba Khutuktu: 위대하고 빼어난 活佛)'라는 최고 권위의 이름을 하사받고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에르덴조 사원을 근거지로 하여 몽골의 제1대 법왕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그는 불교는 물론 예술, 과학, 문학, 언어학 등에서 추종을 불허할 업적을 남겼다. 소욤보라고 불리는 문자를 창제하였고, 큰 사원들을 곳곳에 세우면서 몽골 특유의 사원 건축양식을 창안했으며, 세계 수준으로 평가받는 탱화와 불상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가축 도축법이나 의관 착용법 등 수많은 생활풍습을 만들어 보급하였으며, 종족 간 분쟁을 중재하고 귀족들과 국제정세를 비롯한 외교적 결정과 조약서명에도 참여하였다.

이처럼 에르덴조 사원은 번성하다가 1688년 중앙아시아 준가르와의 전쟁 때 크게 파괴되었다. 그 후 18세기에 다시 건축을 시작하여 1872년까지 62개의 건물과 1천여 명의 승려, 300여 채의 게르가 있는 큰 사원으로 발전했다. 에르덴조 사원 내에는 당시의 영화를 말해주는 두 개의 청동 솥이 있다. 당시 라마승들에게 줄 음식과 차를 끓이는 데 사용한 이 솥은 지름이 2m 가까이 되는 거대한 크기이다.

이 사원은 가로세로 각각 400m 길이의 담이 둘러처져 있어 거대한 성 같았다. 담 중간에는 스투파라 불리는 108개의 돌탑이 세워져 있다. 사리탑 용도인 이 돌탑은 108번뇌를 상징한다. 거대한 크기에 비해 건물은 그다지 많지 않아 썰렁했다. 하지만 광활한 터를 두르고 있는 돌담이 옛 영화를 웅변하듯 호기로운 곡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의 뼈대를 품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내듯 의젓하다.

이 사원이 이렇게 황량하게 변한 것은 공산주의 정권 시절의 수난 때문이다. 특히 1937년 스탈린의 숙청 시기에는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사찰 건물은 단 3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승려가 죽임을 당하거나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사원은 1965년에 '박물관'이라는 간판을 달고서야 다시 문을 열 수 있었다. 이후 1990년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종교의 자유도 되찾아 사원도 활기를 찾았다.

당시 살아남은 세 채의 본당 건물은 안내서에 'Western zuu temple'로 표기된 주운 조(Zuun zuu), 중앙의 걸 조(Gol zuu), 'Eastern zuu temple'로 표기된 바론 조(Baruun zuu)이다. 걸 조가 대웅전 격의 본당 건물인데, 나란히 서 있는 이 3개의 전각 안에는 모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석가모니불의 얼굴은 각각 다른 모습이었다. 주운 조에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인 14세 때의 모습을, 걸 조에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 35세 때의 모습을, 바론 조에는 석가모니가 입적할 당시 나이인 80세 때의 모습이란다. 각각 석가모니의 소년 시절, 장년 시절, 노년 시절을 표현한 것이다.

본당 건물은 매우 웅장한 모습이었지만 막상 실내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좁았다. 그것은 본당을 이중 벽체로 만드는 몽골 사원 건축의 특징 때문이다. 외벽 안에 다시 내벽을 세우고 그 안에 불상을 모시는 것이다. 내벽과 외벽 사이 공간에는 작은 불상을 놓거나 마니차를 돌리며 본당을 돌아볼 수 있는 통로로 이용된다.

2024050101000051500001552
미니 고비.
2024050101000051500001553
권응상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카라코룸 가는 길에 여행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장소가 있다. 고비사막까지 가기 힘든 여행자들을 위해 모래사막의 분위기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미니 고비'이다. 사실 '고비'라는 말 자체가 사막이라는 뜻이니 '작은 사막'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다지 작지도 않다. 폭이 4㎞이고 길이가 100㎞에 이른다. 이 모래들은 항가이 산맥에서 불어온 북동풍에 의해 여기까지 날아와서 쌓였다. 그래서 이곳 지명도 '엘승타사르해', 즉 '분절되어 이어진 모래'라는 뜻이다. 바양고비, 바양옐스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작은 사구가 이어져 있어 초원 속의 색다른 풍경을 선사했다. 우리 일행은 각자의 방식대로 사막을 즐겼다. 말을 타기도 하고 낙타를 타기도 했다. 나는 맨발 트레킹을 했다.

양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편안한 모래알의 감촉이 먼 옛날 이 지역에서 시작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를 떠올리게 했다. 13~14세기 이곳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한 동서 문명교류의 장으로서, 유라시아 대륙에 몽골 주도의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진 곳이다.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