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부산 기장 학리] 학은 어디 가고 봄만 왔나…붕장어 주낙 감는 어부들, 짭짤한 인생사 말해주려나

  • 류혜숙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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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07 10:59  |  발행일 2026-03-07
학리항 등대. 학리는 옛날 마을 솔숲에 학들이 모여 장관을 이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등대의 학은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해 지난해 12월 22일 설치됐다.

학리항 등대. 학리는 옛날 마을 솔숲에 학들이 모여 장관을 이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등대의 학은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해 지난해 12월 22일 설치됐다.

경찰서 벽에 붙은 포켓 화단에 목련 한 그루가 꽃봉오리를 벌리고 서 있다. 태양빛을 흠뻑 맞으려 기지개처럼 피어난 것이 아니라 유난히 파란 하늘을 홀짝홀짝 맛보려는 듯 쉐리 잔처럼 피어있다. 보다 남쪽이니, 보다 봄이 빠를 것이다. 저기에는 용도 폐기된 건물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다. 벽면에 수협이라는 글자가 흐릿하다. '들어가서 사고 나면 네 책임'이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건성으로 읽으며 멀찍이 떨어진다. 바로 옆에는 번듯한 수협 위판장이 우뚝하고 건물의 긴 그늘 속에 주낙 바구니가 수백 개 쌓여 있다. 붕장어를 잡는 어구다. 기장은 붕장어로 유명하고, 그 중 대표적인 붕장어 잡이 포구는 학리다. 붕장어의 어획기는 주로 봄과 가을, 아, 어제가 경칩이었다.


학리 할매 제당. 뒤편 언덕의 큰 소나무와 대문 양 옆의 붉은 기둥이 도드라지고, 초록 담장에 길게 걸린 금줄에 댓가지가 죽죽 매달려 있어 당집이구나 알아본다.

학리 할매 제당. 뒤편 언덕의 큰 소나무와 대문 양 옆의 붉은 기둥이 도드라지고, 초록 담장에 길게 걸린 금줄에 댓가지가 죽죽 매달려 있어 당집이구나 알아본다.

학리는 기장의 대표적인 붕장어 잡이 포구다. 몇 사람이 모여 앉아 주낙 작업을 하고 배는 탈탈탈탈 소리를 내며 작업을 보챈다. 곧 출항할 모양이다.

학리는 기장의 대표적인 붕장어 잡이 포구다. 몇 사람이 모여 앉아 주낙 작업을 하고 배는 탈탈탈탈 소리를 내며 작업을 보챈다. 곧 출항할 모양이다.

◆ 학리의 봄


빨간 등대가 있는 서방파제와 하얀 등대가 있는 동방파제가 커다란 내항을 만든다. 마을은 내항의 남쪽에 자리해 북쪽을 바라본다. 서쪽에서 남쪽으로 둥글게 휘어지는 해안길을 따라 카페가 두셋, 식당이 두셋이고, 남쪽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길을 따라 식당이 또 두셋이다. 차분하고 말끔하게 이어지는 건물들 가운데 마을 제당이 있다. 뒤편 언덕의 큰 소나무와 대문 양 옆의 붉은 기둥이 도드라지고, 초록 담장에 길게 걸린 금줄에 댓가지가 죽죽 매달려 있어 당집이구나 알아본다. 학리에는 할매, 할배 제당이 있다. 이곳은 할매 제당, 할배 제당은 서쪽 산 밑에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1년에 한 번 음력 1월 14일 자정부터 대보름이 시작되는 새벽까지 할매 제당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한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시작의 연례행사다. 금줄에 매달린 댓가지들은 바다에서, 고개에서, 산에서 모셔온 신들이 아닐까. 그끄저께가 대보름이었으니, 혹 신들이 아직 머물러 계실까 꾸벅 인사를 한다.


선착장을 따라 냉동 창고와 작업장이 줄줄이 이어진다. 물량장은 어구들로 가득 차 있는데, 포구에 몇몇 사람이 쪼그리고 앉아 주낙 작업을 한다. 주낙은 한 가닥의 긴 줄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짓줄을 달고, 가짓줄 끝에 바늘과 미끼를 단 것이다. 어업을 나가기 전, 어부들은 바구니에 긴 줄을 둘둘 감아 담으면서 가짓줄의 바늘을 바구니 가장자리에 촘촘하게 꽂는다. 바늘은 수백 개, 미끼는 곰장어, 멸치, 고등어, 오징어 등이다. 주낙을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슥 다가간다. 오징어는 아니네. 멸치도 아니고. "청어." 눈썹을 드리운 채 일에 몰두하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척의 '은수'호 배가 탈탈탈탈 소리를 내며 주낙 작업을 보챈다. 곧 출항할 모양이다. 은수는 누구일까. 등이 훅 뜨거워져서 외투의 앞섶을 열어 제친다. 봄이다.


동방파제 어귀에는 수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자로 늘어서 있다. 뒤편에 바다에 면한 야외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고 내부 좌석도 있다.

동방파제 어귀에는 수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자로 늘어서 있다. 뒤편에 바다에 면한 야외 포장마차가 늘어서 있고 내부 좌석도 있다.

학리 수산물 판매장의 뒤편의 야외 포장마차. 해질녘부터 몹시 바빠진다. 워낙 인기가 많아 이용 시간은 2시간으로 제한된다.

학리 수산물 판매장의 뒤편의 야외 포장마차. 해질녘부터 몹시 바빠진다. 워낙 인기가 많아 이용 시간은 2시간으로 제한된다.

◆ 학리의 낮


포구의 가로등은 목이 긴 학 같다. 그 긴 목과 정수리에 갈매기들이 조르라니 앉으니 그대로 솟대다. 한 작업장의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위풍당당한 여인이 성큼 나와 가까운 내항 바닷물에 무언가를 휙 던진다. 하얀 것들이 포물선으로 떨어져 수면을 찹찹찹찹 치는 순간 갈매기들이 일제히 날아 바다로 달려든다. 그들은 휘휘 몇 초간 소란을 떨다가 다시 가로등의 정수리로 가 앉는다. 작업장에 '아나고 회 썰어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좁고 어둑한 실내에는 몇몇 사내가 선채로 소주잔을 기울인다. 휙 던진 것은 아나고 회의 부산물일 것이다. 갈매기는 새우깡도 먹고 물고기 부산물도 먹는다. 툭, 갈매기 똥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동방파제 어귀에는 수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일자로 늘어서 있다. 1번부터 10번까지 열 개의 가게가 가운데 화장실을 두고 다섯, 다섯씩 대칭을 이룬다. 외갓집, 칠광호, 학리집, 이모집, 일순네, 할무이집, 민이네, 은수호와 한잔해, 딸부자집, 현이네. 가게의 작은 문 앞에 통통한 대파와 배를 가른 허연 장어들이 줄느런하고 주차장은 거의 비어 한산하다. 척 보면 알 수 없지만 가게들 뒤편에는 바다에 면한 야외 포장마차가 숨어 있다. 메뉴는 장어구이, 아나고 회, 각종 해산물, 전복죽, 말미잘 탕 등이다. 투명한 비닐 벽 너머 바다와 포구와 등대가 보이고, 아직 손님은 보이지 않는다. 학리 포장마차는 해질녘부터 몹시 바빠진다.


학리항 등대. 빨간 등대에 흰 학이 날아오른다.

학리항 등대. 빨간 등대에 흰 학이 날아오른다.

청명한 푸른 빛깔의 컨테이너는 해녀사무실이다. 길 없음의 길을 따라 가보면 군부대 들머리가 길을 막아선다.

청명한 푸른 빛깔의 컨테이너는 해녀사무실이다. '길 없음'의 길을 따라 가보면 군부대 들머리가 길을 막아선다.

◆ 학리의 어제


방파제에 몇 사람이 걷는다. 모두 외항 쪽의 높직한 방파제 길을 따라 등대로 향한다. 선착장이 있는 내항 쪽 낮은 방파제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입구에 철문이 설치되어 있고 길 사이에는 가시철조망까지 휘휘 둘러놓았다. 예전에는 텐트치고 낚시하기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 쓰레기 문제가 생겼고 선박 내 무단침입과 도난까지 발생하면서 결국 방파제 길이 쪼개졌다. 가시철조망 사이로 허름한 천막 아래 어구를 손질하고 있는 예닐곱 청년들이 보인다. 조잘조잘 말소리도 들린다. 중국어다. 학리 사람들 대부분이 붕장어 잡이 어선을 타는 삶은 이제 과거다. 하얀 등대에 붉은 학이 날개를 펼치고 있다. 먼 맞은편 빨간 등대에는 흰 학이 날아오른다. 여러 유래와 변천이 있지만, 학리는 옛날 마을 솔숲에 학들이 모여 장관을 이뤘다 해서 학리(鶴里)다. 솔숲에 눈송이처럼 소복 내려앉던 학 본지도 오래 되었다 한다.


동쪽 끝 '길 없음'의 길을 따라 가본다. 청명한 푸른 빛깔의 컨테이너는 해녀사무실이다. 자물쇠가 걸려 있다. 한때 해녀가 수 십 명이었다는 학리. 누군가 수산물 판내장에서 '학리 해녀촌'이라 했더니 주인 할매가 '학리 포장마차촌'이라고 정정해 주더란다. 오늘 어디에서도 물옷을 보지 못했지만, 어쩌면 학리의 해녀는 지금 바다에서 성게와 문어와 멍게와 전복을 잔뜩 따고 있을 지도 모른다. 방파제의 외항은 갯바위로 가득하다. 혹 그녀가 보일까 눈을 부라려본다. 학리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역과 다시마의 종묘 생산과 양식에 성공한 곳이다. 지금도 일대 바다는 온통 미역과 다시마 밭이라 한다. 미역바위를 곽암(藿岩)이라 하는데, 마을에는 백년이 넘은 '학리곽암도'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09년 어업 면허를 교부받기 위해 측량사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학리 마을의 미역바위 분포 지도다. 미역바위의 명칭 및 분포뿐 아니라 위치와 거리 등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무엇이 광대바우일까. 고래암, 선돌배기, 굿당개는 또 어디일까. 모두 미역이 잘 붙는 명당 바위라는데. 당최 아는 게 없어 시무룩한데 바다는 시끌벅적하다. 달아나고, 쫓고, 깔깔거린다. 지들끼리.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외항은 갯바위로 가득하다. 학리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역과 다시마의 종묘 생산과 양식에 성공한 곳이고 지금도 일대 바다는 온통 미역과 다시마 밭이라 한다.

외항은 갯바위로 가득하다. 학리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미역과 다시마의 종묘 생산과 양식에 성공한 곳이고 지금도 일대 바다는 온통 미역과 다시마 밭이라 한다.

>>>여행정보


55번 대구부산고속도로 부산 방향으로 간다. 대감분기점에서 600번 부산외곽순환도로 기장 방향으로 가다 기장IC로 나간 뒤 기장일광 톨게이트를 이용하면 된다. 톨게이트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해 약 250m 정도 직진하다 좌회전해 들어가면 회전교차로가 나오는데 12시 방향으로 직진한 뒤 왼편으로 난 삼성1길, 삼성3길 등 삼성길로 들어가면 일광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에서 기장해안로를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학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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