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경<이선경가곡연구소 대표> |
음악시간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괜히 기분이 좋았다. 중학교에 진학하니 음악시간마다 음악실로 옮겨서 수업을 하는데 풍금 대신 피아노가 있는 데다 다양한 악기들이 가득 있었다. 벽에는 카라얀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오디오 시스템에는 클래식 음악이 늘 흘러나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음악실에 그랜드피아노가 떡하니 있는 거다. 선생님께서 수업에 들어오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만져보려 축지법 쓰듯 계단을 몇 칸씩 뛰어 올라 달려갔는데 음악실은 어쩜 그리도 한결같이 맨 꼭대기 가장자리에 있는지. 매번 5분 정도밖에 허락이 안되었지만 내겐 참으로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음악시간 피아노 반주도 해보고 노래를 좋아한 덕에 학교 합창단에 들어가 대구시민회관(현 대구콘서트하우스) 대극장 무대에 서는 영광도 3년 내내 누렸다.
몇 년 전, 문하생 한 분이 문득 "필요하실 것 같아서…"라며 책을 몇권 주었다. 옛 시절 쓰던 중학교와 고등학교 음악교과서가 아닌가! 학년 오를 때마다 미련없이 버렸던 교과서를 그동안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책을 보자마자 콧등이 시렸다. 누렇게 바래고 표지도 낡은 책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어떻게 배웠을까 의심이 들 만큼 많은 가곡들이 담겨 있었고 진지한 해설에 책이 두껍고 내용이 풍부했다. 들여다 보는 중 한 곡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1922년, 마산 창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총각선생님 박태준은 비슷한 나이의 국어교사 이은상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어느날 짝사랑했던 여학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은상에 의해 가사가 되었고 박태준의 음악이 더해져 '사우(思友)'라는 가곡이 되었다. 이 곡이 바로 최초의 한국가곡 '동무생각'이다.
여기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지하철 2호선의 청라언덕이라는 것을, '백합'이 어느 여학교의 교화라는 것을, 작곡자 박태준이 대구 출신이라는 것을, 박태준의 아내가 이은상의 고종사촌 여동생이었다는 것을 학창 시절엔 전혀 몰랐다. 가곡마다 얼마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는지, 얼마나 더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지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르는 게 더 많다.
한국가곡은 우리말로 된 시(詩)에 음을 붙인 노래다. 그래서 한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고 음악실에서 자주 만난 덕에 소중한 학창시절 추억도 가득 담겨 있다. 나는 한국가곡이 오래오래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많이 찾아 불러야 하고 많이 연주해야 한다. 음악은 연주될 때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이다.
이선경<이선경가곡연구소 대표>
백승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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