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13> 전경련 창설과 미국차관

  •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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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9-06  |  수정 2024-09-11 21:32  |  발행일 2024-09-06 제13면
"가진 건 근면뿐"…허허벌판 울산에 美외자유치 '기적의 시작'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전경련 창설과 미국차관
1962년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식.

1961년의 한국은 국민소득 78불 이하로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오늘날의 방글라데시보다 더 가난했다. 농촌에서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어린이가 없을 정도였고, 하루 세끼 밥을 다 찾아 먹는 사람이 국민의 10% 정도밖에 안 될 때였다. 1963년 필리핀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은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이 123불이라고 하자 그것을 매우 부러워할 정도였다. 박정희 혁명정부의 최대 과제는 빈곤타파였다. 어떻게 하면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가. 신발을 신고 다닐 수 있는가. 혁명정부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했다. 경제인들은 경제인대로 경제를 일으켜 우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그때 경제인들이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한국경제인협회의 창설이었다. 1961년 8월16일 이병철은 한국경제인협회의 초대 회장이 됐다. 이병철은 부회장 세 사람과 함께 매주 한 번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만났다. 이병철이 '기간산업 건설계획안'을 박정희에게 보여주면서 그 내용을 브리핑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이병철은 자금 조달은 해외에서 들여오면 된다고 역설했다. 결국 박정희는 이병철의 구상대로 해외의 자금을 들여오기로 결론지었다. 1961년 9월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산업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회의에서는 세계의 명망 있는 사업가들과 한자리에 모여 사업을 논의했다. 이병철은 국제산업회의에서 돌아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필요한 민간외자도입 추진계획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최고회의에 올렸다. 며칠 후에는 이병철과 경제인협회 회장단이 박정희를 만나 서로 의견교환을 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민간외자도입 교섭단이 만들어진다. 미국으로부터의 외자도입은 이병철이 단장이 되어 직접 나섰고, 부단장은 송대순이었다. 유럽 지역은 이정림이 단장을 맡았다.

당시 외자도입 촉진책의 내용은 이렇다. ①개별기업의 교섭으로는 외자도입이 어려우므로 미국, 유럽, 일본 등 세 지역에 외자유치단 파견을 허락해줄 것 ②민간차관에 대해 정부가 지급보증을 해줄 것 ③민간경제외교를 지원하기 위해 해외공관에 유능한 상무관을 주재시킬 것 ④민간기업이 해외 기업가나 기술자를 자유롭게 초청하여 공장 건설 등의 문제를 협의할 수 있도록 해줄 것 ⑤외자에 의한 공장건설 시 내자를 최대한 융자해주는 동시에 후취담보제도를 마련해줄 것 ⑥외자도입으로 기계를 들여올 때 가동에 필요한 원자재 수입을 허용하고 그 판매대금으로 소요되는 내자를 충당하는 방안을 강구해 줄 것 ⑦장기적으로는 자본시장 육성이 절대 필요하므로 외국의 장기금융기관을 유치하도록 해줄 것 ⑧외자도입 촉진법, 외환관리법, 이중과세 방지조약 등을 합리적으로 추진하여 제정할 것 등이었다. 이런 정부의 정책이 경제인들과의 면담에서 합의되자 드디어 민간외자 유치교섭단이 출발하게 된다.

한국경제인협회 초대 회장 이병철
민간외자 도입 계획안 정부에 건의
미주 교섭단장으로 워싱턴서 설명회
투자자 회의적 親韓 인사 조언 구해
특별공업지구 인프라 등 팁 얻게돼

울산 최적지로 판단 공업지구 선정
상전벽해 韓 경제발전 찬스 만들어


◆외자유치단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전경련 창설과 미국차관
1962년 울산공업단지 부지를 시찰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1961년 11월2일 이병철을 단장으로 하는 미주지역 교섭단이 출발했다. 당시의 동행은 송대순 부단장, 남궁련, 설경동(대한전선 사장), 최태섭(한국유리 사장), 구인회(LG그룹 창업주), 정재호(삼호방직 사장) 등이었다. 이병철은 우선 워싱턴으로 날아가 미국 행정부의 관리와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가졌다. "앞으로 10년 동안 한국이 필요로 하는 투자액은 20억달러 정도로 이 가운데 13억달러는 외자로 충당해야 한다. 이 가운데 10억달러는 세계은행이나 수출입은행의 공공차관으로, 나머지 3억달러는 민간자본을 유치해 충당할 계획"이라고 그 내용을 설명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미국 기업인들은 한국에 대한 차관에 회의적이었다. 가난한 나라에 돈을 꾸어줬다가 어떻게 회수할 것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우려였다. 이병철은 미국의 기업인들이 다소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밴프리트 장군을 찾아갔다. 밴프리트는 6·25전쟁 중에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국전에서 싸웠던 만큼 그는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는 미국 경제계에 발이 넓었다.

밴프리트는 이병철에게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돈을 빌려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환경이 갖춰져야 한다고 가르쳐줬다. ①미국 돈을 빌려서 공업화를 진행하려면 우선 먼저 특별공업지구를 설치해야 한다. 특별공업지구는 교통이 편리해야 하며 용지 확보, 인력 충당이 가능한 곳이어야 하므로 바닷가에 면한 지역이나 교통의 요지여야 한다. 또한 공업지구를 선정할 때 전력, 용수, 수송 등의 인프라가 원활해야만 국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②외자도입법이 합리적이어야 하며 정치·경제·사회적 조건 등이 투자가들에게 맞게 개선돼야 한다 ③투자, 차관기술 제휴내용 등이 명확해야 하며 상환조건과 향후의 수지타산 등이 상세히 제시돼야 한다.

당시 이병철은 울산을 떠올렸다. 이병철은 한때 세계적 규모의 비료공장을 짓기 위해 독일의 라인강이나 로테르담, 안트워프 등 세계적인 공업항구도 가본 적이 있었다. 울산은 그런 세계적 공업지구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했다. 정부와 협의에 들어갔다. 울산을 공업지구로 선정하여 미국의 투자유치단에게 보여 주자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도 그에 동의했다. 1962년 1월11일 한국경제인협회 이사회는 울산공업센터 건설에 대한 건의서를 최고회의에 제출한다. ㉮울산 지역은 최소한 1천만 평의 공장 부지를 확보할 수 있음 ㉯항만의 천혜 조건으로 3만t급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고 부산·포항과 연결하면 대선박단의 출입 조절이 가능함 ㉰육운의 경우도 부산·경주·대구·원주 등을 연결하는 철도와 육로가 망라된 사통오달 지역임 ㉱공업용수로 태화강 및 동천의 유수량과 지하수 개발로 하루 100만t이 가능함 ㉲기후가 온화해 열관리에 유리하며 부산·마산 등 남해안 일대의 인적 자원 유치도 유망함 등이다.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전경련 창설과 미국차관
박정희 대통령이 이병철 회장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박정희대통령기념관 제공>

◆울산산업단지 기공식

1962년 5월10일 소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고 멀리 바다가 보이는 모래사장. 보리밭 한가운데 나무 한 통가리를 잘라 만든 기공식 축하 아치가 덜렁 서 있었다. 다소 살풍경했으나 넘실거리는 보리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이병철 등 기업인들이 모였다. 정부의 요인과 경제인 뒤에는 두루마기에 갓을 쓴 시골노인, 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들 수백 명이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신기해하고 있었다. 박정희가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의 발파 버튼을 눌렀다. 이어 울산공업센터라는 간판이 내걸렸다.

미국에서는 밴프리트 장군을 단장으로 한 28명의 미국 기업인들도 기공식에 참석했다. 미국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제너럴모터스, 포드 자동차, 가전기업 웨스팅하우스, 세계적인 화학기업인 다우케미컬 등 대기업을 비롯해 캐리화학, 비트로비료, 하노버신탁, 텍사코, 스탠더드, 센트럴제강 등의 대표들. 그야말로 VIP 중 VIP들이었다. 미국 경제인들은 망망한 바다를 보면서 망연자실했다. 이를 느낀 경제사절단 단장 밴프리트 장군이 나섰다. 그는 지금 이곳엔 아무것도 없으나 한국인의 끈질긴 근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 측 담당자의 브리핑이 시작됐다. 브리핑 내용은 울산공업지구는 교통의 요충이며 부산·포항 등 대도시가 인근에 있어 노동력 공급이 원활함은 물론 장차 대규모 공업벨트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용수의 공급도 태화강이 있어 충분하며 유사시에는 낙동강 강물을 파이프로 연결하여 공급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삼성가 이야기  전경련 창설과 미국차관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5월26일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기업들과 투자 협상을 했다. 마지막날에는 이병철 회장과 밴프리트 단장과의 공동성명서 발표도 있었다. 이렇게 해서 한국은 어렵사리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찬스를 만들었다.

가진 거라고는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와 드넓은 모래 백사장뿐이었던 나라. 하루 세끼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점심밥은 생략하고 넘어갔던 나라. 점심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해 열 살짜리 어린이가 우물가의 물로 허기를 채웠던 나라. 고무신 한 켤레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던 나라, 대한민국. 그런 나라가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울산이 변하기 시작한다. 불도저의 굉음이 울리면서 울산은 자동차의 도시, 중공업의 도시, 석유화학도시로 모습을 바꾼다. 참, 슬픈 나라였다.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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