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수천억 원짜리 웃음

  • 백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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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5-15  |  수정 2025-05-15 07:59  |  발행일 2025-05-15 제23면
20여 년 전 사회적으로 조명을 받았던 실화다. 은행에서 용역(임시직)으로 근무하던 한 청원경찰은 고객을 대하는 태도가 딱딱하다는 지적을 받자 웃는 연습을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웃음을 머금는 노력 끝에 상냥한 인사법을 찾아내 고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항상 미소 띤 얼굴로 은행 업무에 서투른 아이들과 노약자를 도와주면서 틈틈이 은행 업무와 금융상품도 공부했다. 한발 더 나아가 고객노트를 만들어 대화 내용도 꼼꼼하게 기록했다. 70만원이라는 쥐꼬리 월급을 받는 임시직에 불과했으나 그의 진심을 알아주는 고객이 점차 늘어나 은행 수신고(受信庫)는 수백억 원이 늘었다. 어느 고객은 은행에는 들르지 않고 임시직인 그에게 큰돈을 찾아 배달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신뢰가 쌓였다.

이 무렵 갑자기 닥친 IMF 외환위기로 은행이 도산할 것이라는 위기감에도 그를 믿은 고객들은 돈을 인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임시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고객들은 정규직으로 채용해 달라는 진정서를 냈다. 진정서에는 "그를 정규직으로 채용하지 않을 경우 거래 은행을 옮기겠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결국 꿈에 그리던 정규직이 됐으나 그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른 은행과의 합병으로 권고사직을 당했다. 이번에는 이웃 새마을 금고가 특별 채용을 했다. 그가 직장을 옮길 당시 80억원에 불과하던 새마을금고 자산은 3개월 만에 300억원으로 증가했다. 그의 이직을 알게 된 은행 고객들이 예금을 줄줄이 새마을금고로 옮겼기 때문이다. 항상 웃으면서 맡은 일에 진심이던 주인공은 새마을금고 지점장까지 올랐다. 웃음의 시작은 그런 행복한 결말이 됐다. 웃음이 사라졌다는 요즘, 그런 세태가 그립다. 백종현 중부지역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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