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 스토리] 서울국제도서전서 만난 대만 문학…한국 독자들이 빠진 이유는?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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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6-26 18:35  |  발행일 2025-06-26
섬이란 특성과 아픈 역사, 중심에서 밀려난 존재에 주목
전통 벗어난 성 역할에도 관심…국내 2030 여성독자 호응
대만의 대표적인 산간 마을 지우펀 전경. 1890년대 금광이 발견되며 '황금 마을'로 급성장했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건축 양식이 혼재된 거리가 조성됐다. <게티이미지뱅크>

대만의 대표적인 산간 마을 지우펀 전경. 1890년대 금광이 발견되며 '황금 마을'로 급성장했다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건축 양식이 혼재된 거리가 조성됐다. <게티이미지뱅크>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은 대만이었다. 사상 최초다. 하지만 대만 문학은 이미 국내 독자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열풍이 심상치 않다. 민음사 격월간 문예지 '릿터'는 올해 초 '대만 소설이 뜬다'를 52호 커버 스토리로 다뤘다. 도서전 당시 대만 소설을 펴낸 출판사 부스들에선 개막 첫날부터 대만 소설이 불티나게 팔렸다.


대표적으로 2023년 출간된 천쓰홍의 장편소설 '귀신들의 땅'이 있다. '귀신들의 땅'은 출간 직후 독자들의 입소문을 타며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에서만 3만부 넘게 인쇄됐다. 도입부부터 대만 용징의 풍경이 세세히 묘사된다. 주인공 톈홍은 독일에 머물 때면 고향 대만과 그곳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떠올린다. 천쓰홍의 고향 역시 용진에다 그가 현재 독일에 살고 있는 만큼 사실적이고 자전적이다.


천쉐의 작품은 또 어떤가. 1995년, 25살에 펴낸 첫 소설집 '악녀서'는 자국 문단에 파란을 일으키며 절판됐다. 당시 '18세 이하 열독 금지'라는 꼬리표와 "외설스럽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하지만 파격적인 작품성으로 끊임없이 회자되고 직접 제본해 읽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독자와 연구자들의 끊임없는 요청으로 최근 마침내 복간돼 국내에도 나왔다.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 대만 주빈관 포스터. <서울국제도서전 제공>

2025년 서울국제도서전 대만 주빈관 포스터. <서울국제도서전 제공>

그런데 대만 문학이라고 해서 무조건 국내 독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역사'와 '퀴어'(성소수자) 그리고 '페미니즘'을 다룬 작품이 반응이 좋다. 이는 한국과 대만이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지난 20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의 출판문화의 동향과 전망'을 주제로 강연에 나선 천잉루 대만 에쿠스 출판사 부대표는 "대만 조부모 세대의 역사가 한국과 매우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또 "대만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성평등 담론에서 앞서갔고, 최근 한국에서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성평등에 대한 발언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낯선 대만 문학이 국내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결국 비슷한 시대를 지나온 사람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정서에 있다. 아픈 역사를 직면하는 용기, 주변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태도, 금기를 깨려는 힘…. 그 감정의 결이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그런 대만 문학의 세계를 더 들여다봤다.


역사·언어가 쌓은 '경계'의 정체성

지난 20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 출판계 관계자들이 '대만의 출판문화의 동향과 전망'을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조현희기자

지난 20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 출판계 관계자들이 '대만의 출판문화의 동향과 전망'을 주제로 강연을 펼치고 있다. 조현희기자

대만 문학은 경계에 선 존재들에 주목해왔다. 섬이라는 지정학적 특성과 얽히고설킨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되묻는 방식으로 발전해왔다. 이는 대만의 언어 문화를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대만에서는 수십개의 언어가 사용된다. 중국어(표준어), 대만어, 일본어, 원주민 언어, 방언 등을 포함해 40개 이상이 존재한다. 대만은 원래 오스트로네시아계 원주민들이 각기 다른 언어를 쓰며 살아온 땅이다. 17세기 한족의 대규모 이주로 대만어와 하카어(客家話)가 유입됐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어가 강제됐고, 1949년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옮겨오면서 중국어 중심의 언어 정책이 시행됐다. 국민당 독재정권 시기(1949년~1987년)에는 중국어 사용을 강제하며 학교에서 대만어를 사용하면 처벌하기도 했다. 2019년 국가언어발전법 제정 등을 통해 모든 언어가 평등하게 인정됐다.


이런 배경으로 대만 출판시장에서는 다양한 언어의 문학 작품들이 출간되고 있고,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부러 대만어를 배워 작품에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장자샹의 '밤의 신이 내려온다'가 대표적이다. 대만인들은 가정에선 대만어를 배우지만 대다수의 교육기관에선 표준어인 중국어만 가르친다. 공식 석상에서도 대만어는 중국어에 밀려 거의 쓰이지 않는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 참석차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장자샹은 "대만에서 공부하면 할수록 모어(대만어)를 잊게 된다. 소설에서 '우리도 정체성이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며 대만어로 작품을 쓴 이유를 전했다.


대만 타이베이 중심부에 위치한 국립중정기념당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대만 타이베이 중심부에 위치한 국립중정기념당 전경. <게티이미지뱅크>

한국과 유사한 역사적 소재도 자주 등장한다. 대만은 한국처럼 일제의 식민 지배, 독재정권, 급속한 산업화 등을 겪었다. 한국에서 4·3항쟁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있었다면, 대만에선 장제스 국민당 정권 당시 일어난 2·28사건이 있었다. 2·28사건은 1947년 2월28일 대만 독립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대만인들을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장제스 정부가 무력 진압한 사건이다. 오랜 시간 군사독재 정권을 경험한 한국처럼 대만 또한 계엄 통치 하에 국민당의 독재정권 시기(일명 '백색 테러')가 이어졌다. 이 때문에 한국 문학이 그렇듯 대만 문학도 해당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장자샹의 '밤의 신이 내려온다'는 대만의 2·28 사건을 다루고, 천쓰홍의 '귀신들의 땅' 역시 백색 테러 당시 억압받던 여성들과 동성애자의 애환을 그린다.


퀴어·여성…금기에서 장르가 된 소재들

지난 19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 출신 천쉐(맨 왼쪽)와 천쓰홍(왼쪽 세 번째) 작가가 북토크 '달아오고 돌아오다: 대만 퀴어 문학의 여정'을 진행하고 있다. 조현희기자

지난 19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 출신 천쉐(맨 왼쪽)와 천쓰홍(왼쪽 세 번째) 작가가 북토크 '달아오고 돌아오다: 대만 퀴어 문학의 여정'을 진행하고 있다. 조현희기자

계엄령 해제 이후 대만사회는 점차 열린 분위기로 나아갔다. 천잉루 부대표는 "1990년대부터 민주화와 결합해 대학 동아리와 시대 흐름을 통해 성평등 운동이 활발히 전개됐고, 이로 인해 대만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성차별에 대한 인식 변화가 빠르게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그런 흐름 속에서 대만은 2019년 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하며 또 한 번 전환점을 맞았다. 출판시장도 마찬가지다. 다른 국가에서 다루기 어려운 주제들이 대만에서는 책으로 자유롭게 표현된다. 금기시되는 담론과 주변부의 삶을 조명하는 작품이 꾸준히 나온다.


퀴어 장르를 다루는 천쓰홍과 천쉐는 자신이 각각 게이와 레즈비언임을 공식적으로 밝힌 작가다. 이들은 지난 19일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열린 북토크 '달아오고 돌아오다: 대만 퀴어 문학의 여정'에 참석했다. 천쉐가 1995년 펴낸 단편소설집 '악녀서'는 당시 여성 간의 사랑을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절판되는 아픔을 겪은 바 있다. 이제는 퀴어 서사가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잡고 인기를 끌고 있다. 작가들 또한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당당히 드러낸다.


'악녀서'를 출간한 대만의 대표 작가 천쉐. 연합뉴스

'악녀서'를 출간한 대만의 대표 작가 천쉐. 연합뉴스

이날 북토크에서 천쉐는 "한때는 아내와 함께하는 일상을 SNS에 공유하는 일조차 '작가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다"며 "이제는 이런 일상들을 올리면 '내 글을 읽고 힘을 얻었다'는 반응이 돌아온다. 함께 웃고 우는 독자들이 생겼다"고 밝혔다. 천쓰홍 역시 자신의 고향인 용진 이야기를 꺼내며 "용진은 아직 무지개색(성소수자를 상징하는 색)이 없는 동네다. 하지만 제 책이 입소문을 탄 후 그 책을 들고 용진 거리를 걷는 여행객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 중엔 한국인도 있었다"고 말했다.


천쉐 작가의 '악녀서'와 류즈위의 '여신 뷔페' 표지 이미지. <글항아리·민음사 제공>

천쉐 작가의 '악녀서'와 류즈위의 '여신 뷔페' 표지 이미지. <글항아리·민음사 제공>

여성 서사도 관심을 모은다. 최근 대만 문학계에서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와 성 역할에서 벗어나, 여성의 몸과 욕망, 돌봄 노동 등을 주제로 한 소설들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 작가들은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상' 그 자체를 문학적 주제로 삼으며 기존 남성 중심 서사에 균열을 내고 있다. 페미니즘 문학을 이끄는 작가 류즈위의 소설 '여신 뷔페'는 남성이 주도권을 쥔 회사에서 세 여성 직장인이 악전고투하며 살아남는 이야기로 최근 국내에도 출간됐다. 등구운의 장편소설 '조연 여배우'는 배우로도 활동하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담겨 있다. 등구운은 한국 배우 전지현과 닮았다는 이유로 대만의 한 광고 모델로 출연한 전지현의 대역을 맡으며 연기자로 데뷔했다. 이 책은 우연한 계기로 배우가 된 주인공이 언제나 조연 또는 단역에 머무르면서 느끼는 상실감과 이를 딛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낸다.


한국서도 인기…2030 여성들 사이서 입소문

지난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 주빈관 관계자들이 대만 문화와 서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대만 주빈관 관계자들이 대만 문화와 서적들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처럼 경계에 선 존재들에 주목하는 대만 문학은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도 입소문을 타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 독자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난 18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된 서울국제도서전의 주빈국은 대만으로 '대만 감성'을 주제로 주빈관이 마련됐다. 대만 주빈관에는 84개 출판사가 선정한 500여종의 책이 전시됐다. 입장권은 사전에 조기 매진됐고, 주최 측이 추산한 도서전 관람 인원은 15만명이다. 도서전 현장을 찾은 관람객 대다수가 2030 여성이었다.


19일 현장에서 만난 강모(31·여)씨는 "천쓰홍 작가가 올해 도서전 강연자로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도서전을 방문한 이유를 밝혔다. 최은혜(26)씨는 "대만 문학이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줄 몰랐다"며 "퀴어 서사나 여성 서사처럼 한국에서 논쟁적인 주제들이 대만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다뤄지는 점이 신선하다"고 했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독자들이 올해 대만 주빈관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25 서울국제도서전에서 독자들이 올해 대만 주빈관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 출판계 역시 이런 흐름을 주목하고 있다. 최근 민음사, 마르코폴로, 글항아리 등 여러 출판사에서 대만 소설들을 잇달아 펴냈다. 민음사 격월간 문예지 '릿터'는 지난 2월 '대만 소설이 뜬다'를 주제로 국내 출판시장에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대만 소설을 조명하고, 개별 작품에 대한 감상, 대만 문학의 경향성 등을 소개했다. 한 출판계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사이 대만 문학에 대한 국내 독자들의 관심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이런 관심은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을 계기로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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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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