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근자 소설가
대단지 아파트의 후미진 곳에 뚫린 쪽문을 나가면 꼭 높은 아파트의 그늘 같은 길이 나오고 그곳에 채소 트럭이 있다. 실제로 겨울이면 그 길에 쌓인 눈이 잘 녹지 않았다. 어쨌든 아파트 정문 앞 대로변과 길 건너에는 커다란 시장과 마트는 물론 노점들까지 길게 늘어섰는데, 누가 종류도 몇 가지 안 되는 트럭에서 채소나 과일을 살까 싶었다. 나는 이사 온 후 한동안은 대단지 아파트를 가로지르고 대로를 건너 장을 보러 가곤 했다. 그래도 조금 생뚱맞아 보이는 곳에 있는 트럭을 힐끔거렸다.
조금 싸기는 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트럭 물건의 가격을 외우고 품질을 눈에 담은 채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비교해봤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싼 거 치고 품질이 더 좋을 때도 많았다.
거기다 1톤 트럭 가득히 싣고 오는 채소와 과일은 저녁이 되면 거의 빈 상자만 남곤 했다. 머리카락이 흰 할아버지가 매일 새벽 큰 장에 가서 물건을 떼온다고 말했다. 오늘 다 팔고 가고 싶다는 말도. 그래서인지 떨이도 통 크게 퍼줬다. 바구니에 담아 파는 만큼을 거저 받아 오는 경우도 몇 번이나 되었다.
나는 차츰 트럭에서 파는 채소만으로 요리하는 횟수가 늘었다. 오이가 쌀 때는 오이 냉채나 무침을 만들었고 양상추를 많이 팔 때는 샐러드를 자주 해먹었으며 복숭아가 싸면 통조림을 만들었고 무나 배추를 팔면 김장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한다. 비닐하우스로 재배를 하니 사시사철 파는 것들도 많지만 트럭에는 주로 제철에 나는 흔하고 값싼 것들을 갖춰 놓았다.
할아버지는 "이 동네에 이런 비싼 건 안 팔려"라거나 "여기 사람들은 안 먹어" 같은 말을 가끔 했다. 나는 내 집이 있는 5층짜리 낡은 아파트 단지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대단지 아파트의 주민이 아니라 낡은 동네가 할아버지의 고객이 사는 곳이었으니.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낡은 동네에 사는 사람이라고 비싼 채소를 먹지 않는 건 아니니 말이다. 한때 재건축 바람이 불기도 해서인지, 주차장에는 비싼 외제차도 꽤 들락거리는 동네였다.
나는 저녁이면 상자가 비는 물건의 종류를 눈여겨 살폈다. 그러고 나서 좀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자기 고객의 연령대와 취향을 정확히 알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보다는 노년층이 많았고 명절이나 휴일에는 자식들이 손님처럼 드나드는 동네였다. 고향 같아서, 음식도 어릴 적의 맛을 기대하는 곳이다.
어느 날 그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됐다. 겨우 대여섯 살이나 많을까. 난 왜 그를 나보다 훨씬 더 늙은 할아버지라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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