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혜진 변호사
인기드라마 '서초동'에 주인공 변호사가 보이스피싱 수거책인 중년 여성을 국선으로 변호하는 일화가 나온다. 그 여성은 생활고에 대출을 받으려다 금융거래 실적을 쌓아준다는 말에 속아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돈을 출금해 누군가에게 전달했는데, 알고 보니 그 돈은 보이스피싱 피해자의 돈이었고, 현금을 수령한 사람은 또 다른 수거책이었다. 드라마에서 피고인은 불구속 상태로 사기방조범으로 기소되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 여성은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내가 경험한 현실에서는 현금 수거책은 일반 사기죄보다 형량이 더 높은 전기통신금융사기의 공모공동정범로 구속 기소되는 경우가 많다. 보이스피싱 수거책으로 구속된 이들 중 범죄 전력이 전혀 없고 사회 경험도 부족한 중년 여성들이 종종 있다는 점이 특이한데, 평범하게 살아오다 생활비에 조금이라도 보태려고 알바 자리를 찾다 보이스피싱 일당이 던지는 '고액 알바'의 덫에 걸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박씨 아주머니도 그런 경우였다. 구치소 접견 내내 아주머니는 자녀 이야기를 하며 울먹였다. "우리 현수가 동생 죽은 거 때문에 몇 년간 밖에를 못 나갔어예. 자기가 집에 있었으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거라고 하면서예. 제가 붙잡힌 날은 죽은 현우 생일이었어예. 케이크 들고 정말 오랜만에 현수랑 같이 현우가 있는 추모공원에 갔단 말입니더. 그런데 그날 집에 돌아와서 제가 붙잡힌 거라예. 현수가 겨우 마음이 회복되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어떡해예. 변호사님, 우리 현수 어떡해예……."
아주머니에겐 원래 두 아들이 있었다. 3년 전 당시 다섯 살이던 현우가 엄마가 미처 못 본 사이에 베란다에서 추락해 숨지고 말았다. 하교 후 친구들과 놀다 늦게 돌아온 현수는 그 후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자기가 학교에서 곧장 돌아왔으면 동생이 죽지 않았을 거라고 자책했다. 아이를 실수로 잃은 엄마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돌볼 틈도 없이 동생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현수를 심리치료센터에 데리고 다니며 힘겹게 삶을 이어갔다. 불행은 어찌 그리 세트로 오는지, 막노동으로 성실히 일하던 남편이 다리를 다쳐 한동안 일을 못하게 되면서 생활고가 심해졌다. 아주머니가 반찬비라도 벌려고 아르바이트에 나섰다가 보이스피싱 일당에 낚였고, 하필이면 현우의 세 번째 기일(忌日)에 긴급체포되었다. 현수가 3년 만에 동생을 처음 찾아가 이제 회복되려나 희망을 품던 바로 그날이었다.
접견 때 아주머니에게서 남편 전화번호를 받아 사무실에 돌아와 전화를 했다. 국선변호인이라고 밝히고 아이의 안부를 물었더니 수화기 너머의 중년 남성은 울먹이며 한동안 말을 못했다. 현수가, 동생이 죽고 엄마마저 붙잡힌 그 집을 너무 무서워해 시골 할머니‧할아버지 댁으로 와 있다고, 아내 변호를 잘 부탁한다고 덧붙인다.
보이스피싱 일당들은 피해자만 속이지 않는다. 현금수거책으로 활용할 사람들도 교묘히 속인다. 속는 것은 같지만, 돈을 잃으면 피해자가 되고, 단돈 몇십만 원이라도 받으면 가해자가 된다. 안타까운 사연은 넘쳐나지만, 드라마 속 변호사의 하소연처럼 몸통을 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법원은 수거책이라도 엄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다. 답답한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박씨 아주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변론요지서에 담으며 현수에게 마음 속 응원을 보내는 일 뿐이었다. 현수야, 제발 잘 견뎌줘. 엄마도 너한테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어. 조금만 더 버텨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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