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삶 담아내는 예술…인간됨이 있어야 좋은 시 나온다 믿어”

  • 조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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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8-01 06:00  |  수정 2025-08-01 13:34  |  발행일 2025-08-01

'한국 서정시인의 아버지' 여향 이기철 시인

시 쓰기 외에 다른 일은 못해내

힘들기도 하지만 잘 선택한 것

인생의 절반 바친 모교 영남대

문학·제자교육 모두 이뤄진 곳


대표 시 '청산행' 시비 앞에서의 이기철 시인. " style="width:700px;height:926px;">

대표 시 '청산행' 시비 앞에서의 이기철 시인. "'청산행'은 젊은 시절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조현희기자>

참 소박했다. 1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 내내 겸손하고 담담했다. "시 쓰기 외에 다른 일을 못한다"며 웃은 그는 말 그대로 평생 시를 쓰고 가르쳤다. 수십 권의 시집, 수많은 제자들, 내로라하는 문학상들…. 그런 것들이 쌓였지만 올해 스물세 번째 시집을 펴낸 소감에서 "시인은 늘 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시도 중요하지만 인간됨이 앞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 서정시인의 아버지 여향(如鄕) 이기철 시인(영남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이야기다.


AI가 창작까지 하는 시대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영상까지 제작한다. 시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50년 넘게 시를 쓴, 팔순을 넘긴 노시인은 조심스럽지만 단호했다. 인간만이 건넬 수 있는 감정의 깊이를 이야기했다. "AI가 정말 섬세하고 미묘한 감정까지 창조해낼 수 있을까요? 인간만이 가닿게 할 수 있는 감정의 결, 그건 기계가 흉내낼 수는 있어도 온전히 담아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 시 쓰기란 자신의 가장 깊은 세계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과 경북 청도에 위치한 그의 서재에서 만나 문학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등단한 지 올해 53년째다. 긴 시간 시를 써온 삶에 대해 요즘 어떤 생각을 하나.


"시는 언제 오는지 모르는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저는 중학교 때부터 시를 좋아해 썼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고향인 경남 거창에서 아림예술상을 받았다. 중·고등학교, 일반(성인)부 모두 합해서 1등을 했다. 문학하는 사람들 건너가는 계단이 있다는데 그런 계단을 걸어왔던 것 같다. 시 쓰는 건 늘 어렵지만 보람이 있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시 쓰기 외에 다른 일을 못한다. 스포츠라든지, 등산이라든지 그런 걸 못하니 앉아서 독서하고, 생각하고, 쓰는 일이 전부다. 꽤 힘들기도 하지만 잘 선택했다."


▶고(故) 김춘수 시인과 가까이 지냈다. 김춘수 시인께 받은 영향이 있나.


"학부 시절 경북대에서 개최한 전국대학생문예작품 현상 공모에 당선됐다. 당시 심사위원이 김춘수 선생이었는데, 그 계기로 인연이 생겼다. 김춘수 선생은 제 박사학위 논문의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문학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 2021년 펴낸 '김춘수의 풍경'이란 책도 그런 인연에서 비롯됐다. 책에서 저는 그분을 '식물적인 인간'이라 표현했다. 육식과 술을 멀리했다. 문학에 있어서는 자기 고집과 주장이 두터웠다. 요즘 시인들 가운데는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모른 채 신념 없이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에서 뚜렷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영남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시간 모교 강단에서 강의도 했다.


"현재도 평생교육원에서 매주 강의를 하고 있다. 영남대는 인생의 절반을 바친 곳이다. 월급을 받고 일하긴 했지만,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다. 생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시도, 교육도 모두 거기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영남대에서 '시론'과 '문예창작론' 두 과목을 평생 가르쳤다. 강의 외에도 학생들과 함께한 활동이 많았는데, '영대글벗'이란 문학 모임이 있었다. 문학하는 청년들을 지도했다. 이후 대대로 이어져 20기 넘게 갔고, 그 제자들은 지금 전국 곳곳에서 활동 중이다. 아직도 매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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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철 시인은 "문학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며 '인간됨'을 강조했다. <사진=조현희기자>

▶학생들에게 특히 강조한 배움은. 문학 외의 가르침도 궁금하다.


"서양 현대시 이론을 많이 다뤘다. 프랑스의 폴 발레리, 영국의 T.S. 엘리엇 등의 이론을 많이 섭렵하고 강의했다. 그중에서도 신비평(New Criticism)을 중심으로, 시를 해체해 분석하는 방식의 수업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문예창작도 가르쳐 글을 쓰도록 했다. 그렇게 가르친 가운데 제 수업을 들은 학생 중 등단한 사람이 15명 된다. 그런데 시인으로서 문학과 인간, 이 둘을 나눠서 생각할 수 없다.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저는 문학보다 인간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작품이 아무리 좋아도 인격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시 쓰기란 자기 삶을 담는 행위다. 인간됨이 있어야 좋은 시가 나온다고 믿는다."


▶각자의 선(善)이 모두 다른데, 시인께 '인간됨'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흔히 휴머니즘을 말하는데, 그걸 온전히 실천하는 건 쉽지 않다. 예수의 사랑이나 석가모니의 자비처럼 성인의 몫일 수도 있다. 그래서 저는 자기 삶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에게 문학은 전부이니 시를 가르치고, 좋은 제자가 있다면 계속 쓸 수 있게 도우면 된다. 문학을 통해 베풀고 나누는 것, 그 정도면 된다고 본다. 또 요즘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고 있다. 그 각박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시인이나 예술가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예술은 인간의 마음을 유하고 부드럽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시인의 경우 한 줄의 시, 감동적이고 깊이 있고 아름다운 시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면 시인의 책무를 다하는 것이 아닐까."


이기철 시인은 경북 청도에 서재 '예향여원'을 짓고 2004년부터 '시 가꾸기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조현희기자>

이기철 시인은 경북 청도에 서재 '예향여원'을 짓고 2004년부터 '시 가꾸기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조현희기자>

이기철 시인의 시집들. 대표작 '청산행'을 비롯한 10개 시집. <사진=조현희기자>

이기철 시인의 시집들. 대표작 '청산행'을 비롯한 10개 시집. <사진=조현희기자>

▶2004년부터 청도 서재에서 시를 사랑하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시 가꾸는 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서재 '여향예원'을 짓고 그 다음 해부터 '시 가꾸는 마을'을 시작했다. 젊은 시절 문학에 뜻을 뒀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분들이 있다. 시간을 놓친 분들이 문학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싶었다. '시 가꾸기 마을'이란 이름은 제자들이 지었다. 강의료는 받지 않는다. 역량 안에서 누군가에게 문학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렇게 돕는 일도 제가 실천할 수 있는 인간됨이다."


이기철 시인의 대표 시집 '청산행'. <민음사 제공>

이기철 시인의 대표 시집 '청산행'. <민음사 제공>

이기철 시인이 올해 펴낸 시집 '눈물, 그토록 아름다운 물방울'. <솔과학 제공>

이기철 시인이 올해 펴낸 시집 '눈물, 그토록 아름다운 물방울'. <솔과학 제공>

▶스물 세 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중 시인의 삶을 가장 잘 반영하는 시집은.


"'청산행'이다. 젊은 시절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고향 이야기, 청소년기, 서른 즈음까지의 이야기가 다 담겨 있어 애착이 있다. '오늘의 시인 총서'라는 귀한 시리즈에도 실려 더욱 특별하다. 또 하나는 '유리의 나날'이다. 제 정신의 깊이를 실험해본 작품이다. 내면적이고 어렵지만 비평가들은 높이 평가를 한다. 그러고 칠순쯤 돼서 삶과 정신을 모두 아우른 '영원 아래서 잠시'라는 시집을 냈다."


▶최근 '눈물, 그토록 아름다운 물방울'을 펴냈다. 앞으로 또 쓰고 싶은 시는.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 아무리 좋은 시라도, 읽는 사람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저만의 감수성을 담되, 독자들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결국 시는 내 세계를 타인과 나누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하면 더 호소력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시를 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시단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럼에도 시인이 늘 지녀야 할 태도는.


"시단은 흐름이 있다. 물처럼 고여 있으면 썩는다. 그러다보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시와는 전혀 다른 시들이 나오기도 하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시도 등장한다. 거기서도 남 흉내내지 말고 나만의 언어를 쓰면 된다. 그게 자기 시가 되고 얼굴이 된다. 자기 얼굴 없는 시인들이 많다. 시인은 남을 따라갈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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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희

문화부 조현희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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