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순진 대구대 총장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매미가 요란하게 울어 젖힌다. 여름철 기세가 맹렬하다. 어릴 적에는 여름마다 방학이 있어 좋았다. 방학동안 학업을 잠시 내려놓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친구들과 무리 지어 산이며 들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학기 중에 미처 읽지 못한 책을 잡고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지금이야 방학에도 학생들이 학원을 가혹하게 오가야 하니 방학이라는 말이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그 시절 학생들은 위인전을 즐겨 읽고 독후감을 쓰곤 했다. 세상을 구한 위인의 전기를 보며 애국심이 불타고 가슴이 뛰었더랬다. 전란으로부터 백성을 구한 장군이나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평정한 영웅이 어린이의 장래 희망으로 앞줄에 있었다. 개인을 희생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을 존중하고 본받을 일로 여겼다. 개인의 성공과 가족의 행복을 우선하는 요즘 세태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시대 분위기가 있었다.
위대한 인물들은 역경을 이겨내야 했는데,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잔혹한 전쟁이 거듭되거나 민심이 흉흉하던 때였다.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우리가 배운 동서고금의 역사는 잦은 전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평화 시대는 상대적으로 짧고 역사에도 간략히 기술되어 있다. 100년을 가는 평화가 없다고들 한다. 필자 세대는 운이 좋은 세대다. 늘 전쟁 이야기를 듣고 위인전을 읽으며 자랐으나 전란을 맞지는 않았다.
할아버지 세대는 식민지를 겪으셨고 아버지 세대는 전쟁을 싸워내셨다. 이들 세대는 식민지와 전쟁 이야기를 거듭거듭 하시곤 했다. 일제의 침탈에 관해서 귀가 따갑도록 말씀하셨고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투사들의 힘겨운 역사도 또렷이 기억하셨다.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들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남한과 북한이 대치한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 북한의 도발을 연이어 겪으며 임박한 위험을 항상 생각하며 사셨다.
식민지와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어느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식민지의 참상과 전쟁의 상흔도 점차 희미해져 간다. 바야흐로 평화 시대다. 우리는 지난 세기 눈부시게 성장하였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로는 단연 눈에 띄게 발전하여 당당한 선진국이 되었다. 지금 한반도는 인간이 거주한 이래 최고로 풍요를 누리고 있다. 요즘 젊은이에게 전쟁은 더 이상 현존하는 위험이 아니며 전란은 그저 남의 일이라 여겨진다.
국제정세가 만만치 않다. 지속될 줄로만 알던 평화가 지구 저편에서 쉽게 깨지고 있다. 강대국이 세계 질서를 지키고 국지적인 분쟁이 드물게 일어나던 시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패권국의 독주가 노골화하고 국제질서가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힘센 국가가 이웃 국가를 침탈한다. 우리 사회는 진영 간 갈등이 공멸도 불사하는 적대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자칫 평화는 짧고 전쟁이 긴 역사가 되풀이될까 걱정이다.
곧 광복절이다. 기성세대가 사회를 발전시키고 부를 이루며 성취하고 국가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처럼 다음 세대도 안정된 사회에서 풍요를 누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방학에도 경쟁에 내몰리며 헬조선을 말하는 청소년에게 우리 사회가 무슨 말로 위로하고 희망을 줄 수 있는가? 힘들여 일군 번영이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고 모처럼 만든 평화가 길게 지속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지금이야말로 각성하고 노력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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