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깔끔하지 않아서 좋았던 날

  • 이은미 변호사
  • |
  • 입력 2025-08-18 06:00  |  발행일 2025-08-17
이은미 변호사

이은미 변호사

절친한 사법연수원 동기 언니 두 명과 매일 아침 운동인증 같은 것을 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다. 어느 날 한 언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얘기를 꺼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자고 제안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호랑이 '더피'와 까치 '서씨'는 조선시대 민화인 '호작도'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호작도'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요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인기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외국인 관람객과 국내 관람객으로 북적인다고 한다. 나는 신이 나서 좋다고 국립중앙박물관에 가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약속은 신나게 해 놓고 정작 약속한 날이 다가오면 나가기 싫은 그런 날. 그날은 너무 더웠고, 마침 재판이 없는 휴정기라서 나는 집에서 늘어져 쉬고 싶었기 때문에 약속이 취소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자고 한 언니도 약속이 다가올수록 더 적극적으로 다른 얘기, 주로 '웃기는 유튜브'를 보내는 등 국립중앙박물관에 갈 의지가 박약한 듯한 인상을 주었다. 그럼에도 선뜻 나서서 가지 말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약속이 취소되길 하늘에 빌며, 누구 하나라도 나 같은 마음이라면 제발 용기를 내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지 말자고 말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 어째해서 만날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게 되었다. 12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나는 한 언니와 8호선에서 만나서 같이 가기로 해서 8호선에서 만났다. 이촌역으로 가기 위해 9호선으로 갈아타는데, 둘 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국립중앙박물관역(이촌역)으로 가는지에 대해서 알아볼 의욕이 별로 없이 서로에게 알아서 하겠지 하고 기대다가 겨우 환승했다.


따로 오기로 했던 언니는 평소 엄청 알뜰한 사람으로서, 배달 수수료가 아까워서 배달을 시키지 않으며 택시 몇 번 안 타면 경조사비가 나온다며 평소 직접 운전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되 아무리 급해도 택시를 타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택시를 타고 오고 있다고 했다. 아마 그 언니도 마지막까지 미적거리다가 시간이 임박해서 겨우 무거운 몸을 일으켜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12시에 만났기 때문에 일단 밥을 먹기로 하고 국립중앙박물관 앞에 있는 찜닭집으로 들어갔다. 찜닭을 미친 듯이 먹은 우리는 닭이 줄어들수록 말수가 줄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는 무더운 날씨에 바글바글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람들에게 파도처럼 밀리며 구석기 뗀석기 이런 것부터 동태눈으로 무기력하게 볼 나를 생각했다.용기 내어 말했다. "저는요, 꼭 박물관에 안 가도 돼요." 그러자 다른 언니들이 차례대로 말했다. "나도."


우리는 서로 좋아한다는 말을 숨긴 채 누가 먼저 고백하길 바라며 마음 졸인 청춘의 연인처럼 조심스럽게 서로의 마음을 보인 후 기뻐했다. 그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서 만났는데 우리가 의미 없이 헤어지는 것은 넘 아깝다며 찜닭집 뒤에 시장골목으로 들어갔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조모상을 당한 아이유를 위해 동네 조기축구회 회원들이 장례식장에 와서 위로도 해주고 모든 절차를 함께 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유가 조기축구회 회원들에게 "고맙습니다. 이 은혜 꼭 갚을게요"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들은 조기축구회 회원이 이렇게 말한다. "인생 그렇게 너무 깔끔하게 사는 거 아니에요." 나는 이 말을 좋아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갔으나 가지 않았던 그날. 우리는 깔끔하지 않은 일정을 함께 해서 너무 좋았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