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미 작전명이유 대표
그동안 내가 다뤄온 이야기들은 모두 작은 마을에서 출발했다. 이름을 부르는 방식, 여성들의 택호 문화, 세대마다 달리 쓰인 제땅말, 여성 해방의 서사를 담은 '희추', 나이 든 세대의 자기 선언까지. 언뜻 보기엔 사소해 보이는 장면들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질문이 깃들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서로의 다름을 어떻게 존중하고, 미래 세대에게 어떤 삶의 언어를 물려줄 것인가. 작은 마을의 언어와 풍경은 그 질문에 답하려는 하나의 살아있는 실험이었다.
이 현장을 나는 처음엔 하나의 '사업'으로 만났다. 외부에서 내려와 프로그램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기획자의 입장이었기에, 마을의 '진짜 일원'이 아니라는 열등감이 늘 따라다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록 그곳에 살고 있지는 않아도 매개자이자 촉진자, 때로는 간섭자이자 응원자, 지지자의 역할로 분명히 이웃들의 삶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받았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배운 것은 삶을 대하는 느긋하고 단단한 태도,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서로 다른 삶을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이었다. 기획자로서 얻은 가장 큰 배움은 어떤 사업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언어였다. 내가 마을에 건넨 것이 있었다면, 그 이상을 마을로부터 돌려받았다.
이 경험은 '마을'이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마을은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관계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누군가의 일방적인 희생으로 유지되는 곳이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목적을 위해 서로 기대고 주고받는 관계망이다. 존중과 인정, 그리고 신뢰가 오갈 때 마을은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집단이 된다. 고령화가 가속화되는 지금, 이런 매개자와 촉진자의 역할은 더없이 중요하다. 일방적인 제공과 수혜가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방식이야말로 마을의 지속가능성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마을은 작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삶의 언어는 결코 작지 않다. 작은 마을의 역사와 문화, 생활 속 실험을 오늘의 삶 안에서 다시 살아내는 일. 그 문화 실험들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배우는 것은 결국,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태도와 언어다. 이 언어들을 어떻게 오늘의 삶에 새롭게 불어넣을 것인가. 그 질문을 이제는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때다. 지금 필요한 건 보존이 아니라 현재화이며, 기록이 아니라 실천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