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우열 선생. 출처:동아디지털아카이브

윤우열 선생의 체포 관련 동아일보 보도. 일제가 '허무당 선언서'에 대한 보도를 금지한 탓에 중대사건이라고만 표현돼 있다. 출처ㅣ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올해 대한민국 광복 80주년을 맞아 영남일보는 '내 이름은 투사' 시리즈를 통해 대구를 빛낸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한다. 9월에 소개할 인물은 '허무당 선언서'를 써내려가며 일제에 무장투쟁을 선포하고, 스물셋 나이에 옥고와 병마 속에서 요절한 대구 출신 청년혁명가 윤우열(尹又烈·1904~1927) 선생이다.
◆ '스무 살' 조선의 비극을 깨닫
1904년 대구 남산정에서 태어난 윤우열은 일찍부터 신교육을 접했다. 서울 중동학교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영어과에서 수학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하며, 사회주의·무정부주의 등의 사상과 맞닥뜨렸다. 제국주의 일본의 모순된 현실 속에서 그는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사회의 불평등과 식민지 조선의 비극을 깨달은 것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윤우열은 곧바로 사회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1924년 스무 살 나이에 대구역에서 일하던 철도노동자들을 모아 '철도인부조합'을 결성했다. 당시 철도 하역 인부들은 열악한 처우에 시달렸다. 윤우열은 이들의 상호 부조와 권익향상을 위해 조직을 꾸렸다. 이후 청년운동을 노동현장과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다.
같은 해 조직한 제4청년회는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었다. 노동·농민·소년운동을 포괄한 진보적 조직이다. 윤우열은 서울과 대구를 쉼없이 오가며 사회단체·종교단체·언론기관과 연대해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했다. 1925년 경북 예천과 현풍에서 형평사 회원들이 습격을 당하자, 이 사건을 조사하고 보고하며 사회정의 실현에도 앞장섰다.

대구경북 최초의 근대학교 달성학교의 창설 발기인 명단에 윤필오 제2대 교장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영남일보DB

윤우열 선생의 사망 보도. 출처:동아디지털아카이브
◆ "합법적인 혁명은 불가능"…허무당 선언서
윤우열은 기존 운동방식의 한계도 절감했다. 조선청년총동맹 등 합법적 사회운동에 참여했지만, 그 길만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운동 방침이 지나치게 평이하다"는 비판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동지 박흥곤과 함께 과격한 직접행동을 결심했다.
"합법적으로 현재 질서 내에서 혁명의 가능을 믿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저능아다. 아등은 죽음으로써 맹약하고 폭력으로서 조선혁명의 완성을 기하고자 한다…포악한 적의 학대에 신음하는 민중들이여, 저들의 참인 흉폭한 적을 일거에 격파하자."
이는 1926년 1월 윤우열이 대구 남산정 자택에서 집필한 '허무당(虛無黨) 선언서' 내용의 일부다. 이 선언서는 "현재의 조선은 포악한 적의 착취와 학대와 살육만이 가득한 암흑한 수라장"이라고 규정하고 방화·폭파·총살까지 포함한 무장 행동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이 격문은 신문사, 관공서, 일본 정당과 잡지사 등 177곳에 발송됐다. 대구 청년이 써내려간 이 글은 제국의 심장부까지 알려지면서 사실상 일제에 선전포고를 던졌다.
허무당 선언서가 배포되자 일제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경찰은 신문 게재를 금지하고, 대대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이 정도로 일제가 긴급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유혈과 전사의 각오 없이는 독립이 없다'는 메시지의 영향 탓이다.
윤우열은 여비가 없어 대구로 피신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결국 서울에서 종로경찰서 당국에 체포됐다. 그리고 1926년 경성지방법원 법정에 섰다.
그는 판사에게 "허무당 선언서를 배포한 것은 조선에도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일반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사상을 갖게 된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은 것'으로 사회가 그렇게 만들어줬다"고 선언서 작성 이유를 당당하게 밝혔다.
1926년 경성지방법원은 그에게 출판법·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생활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차가운 감방, 곰팡이 냄새, 굶주림과 폭력. 늑막염을 앓던 그의 몸은 빠르게 쇠약해졌다. 결국 1927년 2월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이미 늦었다. 같은 해 5월23일, 그는 고향 대구 자택에서 스물셋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다음날 대구 공동화장터에서 치러졌다. 동지와 청년들은 눈물 속에 그를 떠나보냈다.

대구 중구 계산동에 있는 윤우열 집터. 현재는 식당 등이 들어서 있고 옛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박영민 기자.

대구 동구 망우동 대구경북항일운동기념탑에 윤우열 선생같이 청년·사회·노동 등 항일 대중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동상. 대구에 별도로 윤우열 선생을 기념할 만한 유적은 없다. 박영민 기자.
◆달랐던 가족, 하지만 기억돼야 할 이름 '윤우열'
윤우열의 생애는 그의 가족이 걸었던 길과 비교될 때 더 선명하다. 한 집안에 친일파·온건파·혁명파의 정치·사회적 행보가 공존한다.
윤우열과 그의 아버지 윤필오의 인생은 대척점에 있다. 윤필오는 1895년 경북도 관찰부 주사로 임명돼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구 첫 근대학교인 달성학교(현 경북고교) 설립에 참여해 제2대 교장을 맡았다. 대중들의 근대지식 개발과 교육기회 확대를 추구한 대구광학회 활동에도 앞장섰다. 이후 경북 영양·예안·비안군수 등을 지내며 행정 경험을 쌓았다.
하지만 윤필오에겐 계몽운동가로서의 빛과 친일협력자의 그림자가 함께 교차한다. 대구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엔 참여했지만, 이후 일진회 가입과 3·1운동을 반대한 '자제단' 참여 등 친일 행적을 남겼다. 결국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5인 명단'에 윤필오의 이름이 남겨졌다.
친형 윤홍열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언론인으로서 부르주아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 윤우열은 감성적이고 모험적인 무장투쟁을 택했다.
경운대 김일수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세 명의 부자는 일제강점기에 계몽운동과 친일활동, 실력양성론, 사회주의적 노선 등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한 집안에 다른 정치노선이 혼재된 것"이라며 "이는 한국 근대의 역동적인 정치지형을 보여주면서, 잘못된 역사를 내부적으로 극복하려는 '자기항상성'의 운동법칙이 작동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우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현재 대구에서 그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후손을 남기지 않았고, 그를 기념하는 장소도 마땅히 없다.
지난 2일 취재진은 윤우열이 허무당 선언서를 집필했던 중구 계산동 자택(계산동2가 1-1) 터를 방문했다. 지금은 식당으로 바뀌었고,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혹시 그 위층에 있던 민간 향토박물관에 흔적이 있을까 생각하고 방문했지만, 현재 문을 닫은 상태였다.
윤우열 선생은 친일관료라는 배경 아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인물이다. 스물셋 청년의 불꽃 같은 삶은 사라졌지만, 대구에서 품었던 그의 정신과 용기는 마땅히 기억돼야 할 것이다.

박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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