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 영화 '애마'로 돌아온 배우 진선규가 20여년 전 연극무대에서부터 쌓은 인연들이 소중한 재산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그렇게 미워하는 눈으로 보지 마셔요.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웃음)
배우 진선규의 요즘 인사말은 적극적인 해명으로 시작한다. 넷플릭스 신작 '애마'에서 맡은 야비하고 비열한 영화사 대표의 이미지를 걷어내기 위한 노력이다.
2004년 연극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후 방송, 영화로까지 옮겨온 그는 한국 영화계가 주목하는 실력파 연기자 중 하나다. 천만관객을 동원한 '극한직업'의 마형사, 독사처럼 팽팽한 살기로 뭉쳐진 '범죄도시'의 조직폭력배 '위성락', 그리고 마니아층에게 큰 사랑을 받은 판타지 영화 '외계인2'의 맹인 검객까지 다양한 캐릭터로 대중과 호흡했다.
천연덕스런 얼굴로 선과 악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가 이번에 도전한 역할은 야비하고 비겁한 영화사 대표 '구중호'다. 법과 정의보다는 권력에게 아부하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편법도 불사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인물이다.
이해영 감독이 극본을 쓰고 연출한 '애마'는 폭력과 불합리로 가득찬 198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세상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군사정부가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3S'(스크린, 스포츠, 섹스) 정책을 장려하면서 제작된 각종 성애영화를 제작하는 구중호 같은 제작자와 그에 맞선 여성들의 연대와 희망을 코믹하게 담았다.
진선규는 극중 당대 최고의 배우 '정희란'으로 분한 이하늬와 갈등하는 씬을 촬영하던 중 배우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을 경험했다. 몇 차례 테이크가 반복되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촬영을 마쳤는데 감독을 위시한 촬영 스태프들이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친 것. 음악회장이 아닌 촬영현장서 기립박수는 난생 처음이었다.
이 뿐 아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구중호 연기에 대한 게시글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동료 배우들의 관람평도 전해졌는데, 이제훈은 "진절머리 나게 잘한다"는 평가를 남겼다.
진선규는 "배우 입장에서 함께 작업하는 동료, 스태프들에게 칭찬을 들으니 정말 기쁘다"라며 "시나리오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던 데다 도덕적이지 않은 인물을 그려보는 것도 배우로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어 참여했다. 누군가에겐 악랄하고 비열한 인물이었지만 그런 사람이 있어서 당대에 '애마부인'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지 않았을까. 구중호는 나름의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넷플릭스 영화 '애마'로 돌아온 배우 진선규가 20여년전 연극무대서부터 쌓은 인연들이 소중한 재산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2시간 분장으로 만든 '섹시 외모'
▶요즘 가는 곳마다 욕을 많이 먹는다고 들었다.
"처음 시나리오를 보면서 '내가 만약에 연기를 잘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겠구나'고 생각했어요. 근데 진짜로 많은 동료와 팬분들이 짜증난다고 말씀을 하세요. 욕을 먹으면 먹을수록 저는 속으로 인물이 잘 표현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연기한 것을 보면 캐릭터 분석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감독님의 디렉팅을 따랐어요. 감독님은 비열하고 못돼 처먹고, 그러면서도 섹시하기를 원하셨죠. 분장팀과 의상팀에서 수고를 많이 해주셔서 구중호의 욕심과 욕망을 나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분장을 하는데 매번 시간이 많이 걸렸다고 하던데.
"저라는 사람이 섹시하지 않은데, 섹시하게 보이도록 하려니 스태프들의 고생이 많았어요. 분장의 기초작업만 30분이 걸렸으니까요. 제 배우 인생에서 그렇게 공들여 분장한 것도 처음이었죠. 여튼 그렇게 공들여 메이크업을 했더니 진짜 얼굴에서 광이 나더라고요. 외국 멋쟁이들처럼 머리도 넘기고, 옷도 잘 입혀주시니 연기가 자연스럽게 잘 나오는 것 같았어요."
▶'애마부인'은 1980년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는 동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 같은 것이다. 진선규 배우 역시 1977년생으로 '애마부인'이 나올 때를 조금은 기억할 것이다. 그때와 지금의 '애마부인'을 보면서 하고 싶은 말은?
"제가 10대 중·후반이었을 때 한국에서 성애영화들이 우후죽순 제작됐어요. 저는 극장에서는 못보고 한참 지난 뒤 비디오방에 넘어왔을 때 친구들과 같이 관람했었는데요. 그때는 무척 야하구나, 이래서 19금이구나 하면서 봤는데, 지금 다시 봤더니 수위가 그다지 야하진 않더라고요."
▶구중호는 여배우를 성적으로 상품화하는 캐릭터다. 이 악역을 연기하면서 주안점을 둔 부분이 있었다면?
"구중호는 악인임에 분명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런 부류의 사람이 있었기에 사회가 흘러갔고, 성애영화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제가 맡은 역할인 만큼 구중호를 합리화한다면 그는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요구를 꿰뚫었고,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영화 제작자로서 좀 더 자극적인 영화를 만들지 않았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넷플릭스 영화 '애마'로 돌아온 배우 진선규가 20여년전 연극무대서부터 쌓은 인연들이 소중한 재산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극한직업' 멤버들 카톡방 소통
▶촬영현장에서 기립박수가 나왔다고 해 화제가 됐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성애장면을 두고 이하늬 배우와 다투는 장면이었어요. 왠지 지금도 좋은데, 계속 찍다 보면 좀 더 좋은 장면이 나올 것 같은 공감대가 감독님과 저희들 배우에게 모두 있었던 것 같아요. 계속 몇 번을 하다 보니까 진짜 하늬랑 저랑 그냥 거기에 오래동안 존재해온 사람처럼 티키타카를 하게 됐고, 신을 딱 끝내고 나서는 서로가 '와~' 하는 느낌을 같이 느꼈어요. 눈빛을 보면서 좋다고 느꼈는데, 갑자기 컷 하면서 박수가 터진 거에요. 배우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순간이었어요."
▶1980년대의 구중호는 권모술수를 통해 재력을 쌓고, 권력까지 얻었다. 2025년 한국 영화계에서 구중호라는 인물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나.
"절대 아니죠. 이제 구중호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세상이 됐습니다. 중호 같은 인물이 있어서도 안되고, 있더라도 오래 있을 수 없는 환경이 된 것 같아요."
▶이하늬와는 천만영화인 '극한직업'에서도 함께 작업했던 만큼 호흡이 잘 맞았을 것 같다.
"맞아요. 하늬는 저를 잘 이끌어주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맞춰주죠. 제게 '극한직업' 멤버들은 그냥 좋은 사람들이고, 지금도 여전히 카톡방으로 소통하고 있어요. 일상의 사진을 공유하기 때문에 누가 뭘 하는지도 다 알아요. 그리고 일년에 한번, 영화가 개봉한 1월23일 저녁에는 다같이 만나서 함께 밥도 먹고요."
▶활동하면서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무척 든든한 것 같다.
"물론이에요. 사실 좋은 사람들은 많아요.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오늘 만나도, 몇 년 만에 만나도 똑같은 그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좀 다른 것 같아요. 제 활동의 출발점인 연극 무대에서 쌓은 인연을 비롯해 좋은 친구들을 하나둘 만들어 놓은 것이 저의 재산입니다."
▶배우 동료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현했는데, 예전부터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오래 전 '범죄도시'로 첫 인터뷰 할 때 '물 들어왔다고 노 젓지 않고, 배를 좀 더 크게 만들어서 동료들을 태우고 가고 싶다'고 말했어요. 평생 함께 하고 싶은 동료들과 같은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무명에 가까웠던 이들이 이제는 하나둘 이름도 알려지고 자신들의 색깔을 드러내고 있어요. 함께 항해를 떠날 수 있는 좋은 배우들이 곁에 있어서 아주 좋습니다."

김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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