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거창 감악산 감악고도] 안개 자욱한 해발 900m ‘무장애 산책길’ 꿈속을 걷는 듯

  • 류혜숙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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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12 14:50  |  발행일 2025-09-12
별바람언덕.

별바람언덕.

안개다. 감악산 정상부는 안개에 싸여 있다. 가까운 꽃들이 희미하다. 그 커다란 풍력발전기도 사라졌다. 산 아래 선명하던 거창 읍내도, 장쾌하게 펼쳐지는 첩첩 산그리메도 보이지 않는다. 안개는 잠시 옅어졌다가 금세 짙어지기를 반복한다. 부드럽고, 신선하다. "한 개도 안 보인다." 한 개도 안 보인다는 사람들의 음성이 들뜸으로 가득하다. 감악산에 안개는 잦은 일이라 한다. 이곳을 세 번 올랐는데, 안개는 오늘이 처음이다. 그래서 신령님이 된 듯 신나서 안개 속을 훨훨 난다.


감악산 무장애 나눔 길 입구. 해발 900m에 조성한 전체 거리 3.5km의 산책로다. 별칭 감악고도로 감악산의 높은 산책길을 의미한다.

감악산 무장애 나눔 길 입구. 해발 900m에 조성한 전체 거리 3.5km의 산책로다. 별칭 '감악고도'로 '감악산의 높은 산책길'을 의미한다.

감악고도에 들어서면 산 사면을 가득 채운 잣나무 숲 가운데로 포장된 길이 나있다. 곧 몇 그루의 자작나무가 어둑한 잣나무들 속에서 빛을 낸다.

감악고도에 들어서면 산 사면을 가득 채운 잣나무 숲 가운데로 포장된 길이 나있다. 곧 몇 그루의 자작나무가 어둑한 잣나무들 속에서 빛을 낸다.

◆ 감악산 무장애 나눔 길, 감악고도


검은빛을 띤 푸른 큰 산, 감악산(紺岳山)은 거창의 진산이다. 해발 952m의 높고 가파른 산이지만 정상부는 '감악고원' 또는 '별바람언덕'이라 불리는 5만㎡ 넓이의 평원이다. 산등성이를 따라 7기의 풍력발전기가 당당히 늘어서 있고, 해맞이 전망대가 숲에 가려져 있고, 한국천문연구원 인공위성 레이저 관측소의 돔 지붕이 멋지게 반짝이고, 가을이면 청보라, 진보라, 분홍보라 등 온갖 보랏빛의 아스타 꽃으로 뒤덮이는 곳이다. 지난해 11월 이곳 해발 900m에 '무장애 나눔 길'이 개통됐다. 별칭 '감악고도(紺岳高道)'로 '감악산의 높은 산책길'을 의미한다. 전체 거리 3.5㎞, 전 구간 경사도 8도 이하로 오르내림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무장애 산책길이며 주차장에서 시작해 정상 부근을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원점 회귀형 코스로 설계되어 있다. 두 여인이 '감악산 무장애 나눔 길' 안내판을 들여다보고 있다.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에 폭 둘러싸여 있네."


데크길 난간을 따라 핸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감악고도는 전 구간 경사도 8도 이하로 오르내림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무장애 산책길이다.

데크길 난간을 따라 핸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감악고도는 전 구간 경사도 8도 이하로 오르내림이 전혀 없는 말 그대로 무장애 산책길이다.

지리산전망대.

지리산전망대.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에 폭 둘러싸여 있네."라는 말처럼 세 산을 조망하는 전망대가 있고 합천호까지 총 4개의 전망대가 있다.

양 여닫이 판문이 달린 일주문을 통과해 감악고도에 들어선다. 산 사면을 가득 채운 잣나무 숲 가운데로 포장된 길이 나있다. 잣나무 숲은 으스스할 정도로 깊이 도저하다. 곧 몇 그루의 자작나무가 어둑한 잣나무들 속에서 빛을 낸다. 자작나무 숲은 작은 규모지만 참으로 가려한 모습으로 걸음을 붙잡는다. 저기 앞서가는 젊은 부부를 불현듯 알아차린다. 스침도 존재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의 허리를 꼭 안은 채 한 몸으로, 하얀 안개 속으로 멀어진다. 포장길이 데크길로 바뀐다. 길 아래가 천 길 낭떠러지라는 의미겠다. 데크길 난간을 따라 핸드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무장애 나눔 길'은 산림청 산하 한국산림복지진흥원이 주관하는 사업이다. 모든 국민이 숲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사업은 2016년부터 시작되어 9년간 전국 17개 지역, 113곳의 숲에 무장애 길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이 핸드레일을 붙잡고 한발 한발 나아가는 사람도 있겠지. '지리산전망대'가 나타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몇몇 사람들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있다.


가야산 전망대. 노란별이 누워있는 큼직한 테라스로 가야산과 오도산, 의령 자굴산, 합천 황매산까지 조망되지만 오늘은 아니다.

가야산 전망대. 노란별이 누워있는 큼직한 테라스로 가야산과 오도산, 의령 자굴산, 합천 황매산까지 조망되지만 오늘은 아니다.

◆ 전망대에서 전망대로 이어지는 안개 고도


전진과 멈춤을 반복한다. 우뚝 멈추면, 몇 걸음 뒤에서 조용히 따르던 안개도 슬그머니 멈춘다. 목에 붉은 수건을 두른 남자가 안개 속에서 나타나 성큼성큼 스쳐 사라진다. 개머루가 익어간다. 미국 자리공은 검 보랏빛 열매를 송글송글 맺어 놓았다. 팽나무 열매도 슬쩍 붉은 빛을 띤다. 팽나무의 속명은 켈티스(Celtis)인데, '단맛이 있는 열매가 달리는 나무'라는 고대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열매를 가만 노려보다 그만둔다. 그래, 신맛일거야. 범부채 열매는 아직 초록이다. 9월에 여물어 종피가 갈라지면 포도송이 같은 까만 종자가 팡 드러날 것이다. 딱, 소리가 난다. 도토리다. 밤송이도 머지않아 벌어지겠다. 열매들이 열심히 익어가는 동안 가을의 여인인 주홍서나물이 하얀 갓털을 펼쳐 놓았다.


'합천호 전망대'에 닿는다.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길에서 이따금 사람들을 보지만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면서도 알 수 없다. 그들은 갑자기 보이고, 또 보이지 않는다. 노란 마타리, 청자색의 산박하, 하얗고 깨알만 한 신감채, 노란 미역취 꽃을 보느라, 나는 자꾸만 그들을 놓치고 안개 속에 남는다. 모든 풍경을 감춰버린 안개 속에서 작은 꽃들은 보다 소중하게 발견된다. 이제 '가야산 전망대'다. 노란별이 내려앉은 큼직한 테라스다.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부부가 주저앉아 소박한 점심을 먹는다. 소주 냄새를 풍기는 사나이들은 전망대를 떠받치고 있는 다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축과 토목에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다.


'가야산 전망대'를 지나면 데크길은 감악산의 북서 면에서 서남 면으로 이어진다. 더욱 축축한 한기가 떠돈다. 머플러를 둥둥 감고도 오슬오슬 하다. 바람도 없고 새소리도 없다. 드물게 빛이 들어 풀이 무성한 숲에서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취나물 꽃이 많이 피었다. 가을이 닿자마자 취나물은 꽃대를 올리고 가장 먼저 꽃을 피워 씨를 맺기 시작한다. 고사리가 흔하다. 바위들은 이끼에 뒤덮여 있다. '가는 잎 그늘사초'가 푹신한 긴 털 카펫처럼 누워있다. 무성하게 가는 잎들 속에 어리고 푸른 것들이 한줌씩 자라나 있다. 그것들은 물푸레나무이고 당단풍나무이고 또 생강나무와 초록싸리와 신갈나무, 방아풀 등이다. 모든 어린 것들은 어여쁘고, 그들이 가는 잎 그늘사초의 풍성한 품 안에서 함께 자라나는 모습이 몹시 아름다워서 찡하다. 목에 붉은 수건을 두른 남자가 또 지나간다. 뭐여, 두 바퀴째 인거야?


덕유산전망대는 마침내 전망을 보여준다.

덕유산전망대는 마침내 전망을 보여준다. "이제 보이네." 덕유산은 보이지 않지만, 마주한 산자락과 골짜기의 조그마한 촌락들이 보인다.

저기 '덕유산전망대'가 있다. 전망대는 마침내 전망을 보여준다. 덕유산은 보이지 않지만, 마주한 산자락과 골짜기의 조그마한 촌락들이 보인다. "이제 보이네." 막 도착한 단체는 충청도 사람들 같다. 그들은 '이제 보이네' 이 한마디 고음을 남기고 시크하게 떠났다. 거의 곧장 그들을 뒤따랐다 여겼지만 그들의 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그들이 환영처럼 사라진 자리에 참나물 꽃이 피었다. 참나물 꽃의 꽃말은 행운이다.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데크길이 끝나고 다시 포장길이 나타난다. 바짓단을 둥둥 걷어 올린 장년의 사나이가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마주 온다. 맨발이다. 이 포장길은 황토인 것 같다. 저 멀리 길 끝에 짙은 안개에 싸인 주차장이 보인다. 맨발의 사나이가 다시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스쳐 지나간다. 황토포장길을 맨발로 왕복하는 그는 축지법을 통달했음이 분명하다.


별바람언덕. 아스타 꽃이 만발하면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날이 다가오고 있고, 감악산은 축제 준비로 분주하다.

별바람언덕. 아스타 꽃이 만발하면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날이 다가오고 있고, 감악산은 축제 준비로 분주하다.

별바람언덕은 여전히 안개다. 휠체어를 탄 사람이 아스타 꽃밭 가운데 야자매트 길을 끙끙 오른다. 야자매트 길에서 휠체어의 전진은 무척 힘든 일이라는 것을 처음 깨닫는다. "한 개도 안 보인다. 더 짙어졌다." 음성들은 여전히 들떠있고, 사람들과 풍력발전기는 있다가 없다가 한다. 안개가 짙으니 내일은 맑겠다. 아스타 꽃이 만발하면 이곳에서 축제가 열린다. 축제의 날이 다가오고 있고, 감악산은 축제 준비로 분주하다. 한량으로 별바람언덕을 거닐다 목에 붉은 수건을 두른 남자를 또 본다. 차마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는 분명 감악산 무장애 나눔길을 세 바퀴 원점회귀 했을 것이다.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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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


12번 대구광주고속도로 거창IC로 나가 로터리 8시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국농소삼거리에서 우회전, 월평사거리에서 우회전해 가다 1084번 도로를 타고 남상면 방향으로 간다. 남상면사무소 지나 연수사 이정표 따라 좌회전해 직진, 청연마을 버스정류장과 연수사 이정표가 있는 고갯마루에서 좌회전해 직진하면 된다. 축제 플랜카드가 곳곳에 걸려 있어 길 찾기는 쉽다. 별바람언덕 주차장에서 감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우측에 '무장애 나눔 길, 감악고도' 입구가 있다. '제5회 감악산 꽃별 여행'이 오는 9월 19일부터 10월 12일까지 '별바람언덕'에서 열린다. 올해 축제는 '보랏빛 노을 속으로'라는 주제로 보라색 아스타 국화 30만본과 새로 조성된 구절초, 벌개미취, 청화 쑥부쟁이 40만본 등이 절정을 이룰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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