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대구국제오페라축제와 한가위 달빛

  •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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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09-29 06:00  |  발행일 2025-09-28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임진형 음악인문학자·대구챔버페스트 대표

추석이 가까워오며 보름달이 서서히 차오른다. 둥근 달은 사랑의 환희이자 텅 빈 마음이다. 빛나는 달은 차오르는 동시에 이내 기울고, 휘영청 밝은 달에도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다. 그렇듯 우리는 유한 속에서 무한을 꿈꾸며 살아간다. 달은 시인과 예술가를 닮아 있다.


지금 대구에서는 '제22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번 축제는 '영원(Per Sempre)'을 화두로 삼아, 죽음과 탄생이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 속에서 인간의 덧없는 생을 두레박처럼 예술의 언어로 길어 올린다. 달빛이 어둠을 뚫고 나와 대지를 비추듯, 예술은 시간을 영원의 빛으로 번역한다.


이러한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이가 있으니, 현대미술작가 이배다. 그는 오랫동안 숯이라는 재료로 소멸과 재생, 어둠과 빛, 인간과 자연의 순환을 탐구해왔다. 모든 빛을 흡수하며 완전히 타버린 끝에 남은 숯은, 오히려 새로운 빛을 발산한다. 축제 포스터에 담긴 숯의 드로잉은 어둠을 통과해 마침내 발하는 빛의 은유처럼, 오페라의 서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음악과 미술이 앙상블을 이루며, 축제는 인문적 시공간으로 확장된다.


이번 무대에 오를 작품들은 인간 존재의 비극과 숭고를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개막작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는 오해와 복수가 낳은 비극적 굴레를 그린다. 비제의 '카르멘'은 사랑과 집착이 불러온 파괴적 힘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욕망과 사회적 갈등이 빚어낸 희극적 풍경을 드러낸다. 폐막작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죽은 연인을 되살리려는 사랑의 여정을 통해 죽음과 부활의 신화적 구원을 보여준다. 네 작품의 배열은 마치 단테의 '신곡'을 연상케 한다. 죄와 욕망, 절망의 늪을 지나 연옥과 천국의 빛으로 향하는 여정. 인간의 고통과 한계를 직시하면서도, 그 너머의 삶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음악은 들려준다.


단테에게 사랑과 죽음의 체험은 그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며, 예술과 신앙의 새로운 세계를 여는 빛이 되었다. 사랑은 언제나 상실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상실은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자기 발견의 길을 열어주는 문이다. 한가위 보름달이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을 함께 품듯이, 그 달빛은 우리에게 풍요와 상실을 동시에 비추며 마침내 또 다른 시작, '비타 노바(Vita Nova,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이번 오페라축제에서 내건 '영원'이란 것도 상실과 회복, 빛과 그림자, 삶과 죽음이 교차하며 생성해 내는 순환의 고리이자 질서다. 보름달이 차면 기울 듯이, 인간은 유한하나 예술은 그 유한성 속에서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것이야말로 오페라와 철학, 그리고 자연이 함께 들려주는 아름다운 진실이다.


한가위는 공동체가 곡식을 나누고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자리였다. 오늘날 대구오페라축제는 음악과 감동을 함께 나누는 현대적 의례로 그 전통을 이어간다. 무대 위의 예술가와 객석의 시민이 함께 호흡하며, 도시는 예술의 토포스로 다시 태어난다. '공간'이 기억과 서사를 품은 '장소'로 변모하는 순간이다.


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달과 숯, 그리고 오페라는 축제라는 순환의 고리를 따라 진실을 더 깊은 울림으로 전한다. 소멸 속에 피어나는 꽃은 얼마나 눈부신가.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빛은, 죽음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과 예술은 한가위 달빛 아래 이곳 대구에서 되살아난다. 그것은 전통과 현대가 만나는 자리에서 탄생하는 또 다른 시작, 새로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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