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메일] 패배할 수 있는 용기 : 知恥後勇(지치후용)

  •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 |
  • 입력 2025-12-07 23:00  |  발행일 2025-12-07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2021판 미생'으로 불린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는 블로그 연재 소설이 인기를 얻어 단행본으로 출판되고, 이를 원작으로 한 네이버 웹툰을 거쳐 JTBC가 2025년 10월부터 12부작으로 제작한 드라마다. 연출은 '대물' 'SKY 캐슬'의 조현탁 PD가 맡았고, 주연 류승룡과 명세빈이 각각 김낙수와 박하진 역을 맡아 극을 이끌었다. 원작 소설은 누적 50만 부 판매, 블로그와 SNS 누적 조회수는 1천만 회, 2022·2023년 전국 도서관 비문학 대출 1위를 기록하며 방영 전부터 높은 관심을 받아왔다.


드라마는 입사 25년 차 ACT 영업1팀장 김낙수(류승룡 분)가 서울 자가와 대기업 부장이라는 '성공'의 상징 속에서 임원 승진을 꿈꾸지만, 지방 발령·희망퇴직 권유·부동산 사기·가족 갈등 등 일련의 위기를 겪으며 삶의 본질을 되돌아보는 여정을 따라간다.


작품의 중심에는 김낙수와 그를 둘러싼 상무 백정태, 그리고 실적과 능력을 앞세워 빠르게 부상하는 후배 도진우가 있다. 김낙수는 흔히 말하는 '성공의 3종 세트'를 갖춘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이 성공 서사를 해체하는 데서 출발한다. 어느 날 그는 라이벌 도진우가 반포 60억원대 아파트 '자가'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나도 잘 살아왔다"는 자기 확신은 단번에 무너진다. 성공은 도착점이 아니라 끝없이 갱신해야 하는 순위표가 된다.


이들의 경쟁 한가운데에는 백 상무가 있다. 입사 때부터 낙수와 함께해온 상사지만 사내 정치에 능하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 태세를 바꾸는 인물이다. 겉으로는 낙수를 친동생처럼 챙기는 듯 보이나, 실상은 자신의 다음 스텝을 위해 후배를 디딤돌로 삼는 데 주저함이 없다. 조직 기류가 바뀌자 그는 망설임 없이 낙수를 아산 공장으로 좌천시킨다. 직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오랜 관계도, 과거의 충성도, 심지어 누군가의 삶까지도 희생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다.


도진우는 더 노골적이다. 회사가 선호하는 '전략적 인재'지만 성공을 위해 타인을 배신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김낙수가 흔들리자 곧바로 거리를 두고 상사에게 자신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며, 누군가의 몰락을 자신의 기회로 계산한다. 윤리적 고민 없이 기회에 올라타는 모습에서 도진우는 '비열함'을 경쟁력처럼 사용하는 인물로 드러난다.


이 세 사람은 아산 공장 사고 이후 극명하게 대비된다. 회사는 사고를 명분으로 노동자들의 정리해고를 추진하고, 김낙수에게 해고 명단 작성이라는 비정한 임무를 맡긴다. 백 상무는 이 순간 역시 빠르게 책임을 피하고, 도진우는 김낙수가 본사로 복귀할 가능성을 경계하며 그의 옛 팀을 더욱 고립되게 만든다.


그러나 김낙수는 다르다. 그는 공장에서 만난 노동자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며, 숫자로 처리해야 할 존재들이 누군가의 가족이고 생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고 명단을 써내는 행위는 관리가 아니라 절단이었다. 결국 그는 명단 대신 자신의 사직서를 제출한다. 조직의 승리에서 이탈한 결정이며 생존이라는 면에서 보면 완전한 패배지만, 김낙수는 그것을 선택하는 용기로 사직서를 택한 것이다. '知恥後勇(지치후용)', 부끄러움을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용기가 생긴다. 그의 사직은 패배가 아니라 부끄러움을 마주한 뒤 얻은 용기였다.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을 버리는 것이 능력처럼 포장되는 시대에, 김낙수의 선택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패배를 감당할 수 없는 리더가 과연 리더일까?


우리 주변에 백 상무와 도진우처럼 승리만을 좇는 리더는 많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을 잃고 공동체를 약화시키는 승리다. 김낙수의 패배는 반대로 누군가의 생존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존경합니다. 진심으로요."


옛 직장에서 세차를 하는 김낙수에게 후배 송 과장이 건넨 이 한 마디는, 진정한 리더십이란 승리의 기술이 아니라 패배를 감당할 수 있는 품격임을 보여준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