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완 유메타랩 대표
일본 교토대학의 한국학 연구자 오구라 기조는 1998년 저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에서 한국 사회를 '도덕 쟁탈전을 벌이는 극장'으로 묘사하며, 도덕 지향적 사회라 규정한다. 여기서의 '도덕 지향성'이란 실제로 도덕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언행을 도덕의 잣대로 환원해 평가하는 사회적 경향, 능력이나 성과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보이느냐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구조를 가리킨다. 이런 오구라의 지적은 오늘날에도 유효해 보인다.
최근 배우 조진웅의 소년범 전력 폭로와 은퇴 선언은 이 도덕 극장의 작동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걸 단순히 개별적인 사건으로만 여길 수 없다. 우리는 매달, 어쩌면 매주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발언이 발굴되고, 맥락과 무관하게 재단되며, 사과문이 올라오고, 그래도 부족하다는 여론이 들끓고, 결국 공적 영역에서 퇴장한다. 이른바 '캔슬 컬처'라 불리는 이 일련의 과정은 이제 하나의 정형화된 의례처럼 반복된다.
이런 현상의 뿌리는 깊다. 조선시대 당쟁은 무력이 아닌 명분의 싸움이었다. 도덕적 정당성을 쟁취하면 권력과 부가 따라왔고, 패배하면 사형이나 유배를 면치 못했다. 상대의 도덕적 결함을 얼마나 날카롭게 들춰내느냐가 곧 정치적 생존을 결정했다. 현대 한국에서 물리적 처형은 사라졌지만, 사회적 처형의 매커니즘은 오히려 더 정교해졌다. SNS는 24시간 가동되는 도덕 법정이 되었고, 알고리즘은 분노를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변호의 기회도, 맥락을 설명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도덕적 흠결이 발견되면 그간의 업적이나 변화와 무관하게 전면적 자격 박탈로 이어진다. 90점짜리 인간은 없다. 100점 아니면 0점인 것이다.
조진웅의 경우도 그렇다. 30년 간의 배우 생활, 그 사이의 변화와 성장, 소년법이 전제하는 갱생의 가치. 이 모든 것이 '위선자'라는 단일한 프레임 앞에서 순식간에 무화되었다. 한 인간의 삶 전체가 과거의 한 시점으로 환원되어버린 것이다. 누구도 그 30년의 무게를 저울에 올리지 않는다.
물론 피해자의 존재를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실제 피해자가 수십 년간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 상처는 어떤 논리로도 상대화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논의 구조가 얼마나 피해자 중심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대부분의 논쟁은 '저 사람이 계속 활동해도 되느냐'에 집중될 뿐, 피해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형태의 회복이 필요한지는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가해자의 퇴장이 곧 정의의 실현인 것처럼 소비되지만, 그것이 실제로 피해자에게 무슨 의미인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어쩌면 이 격렬한 도덕 경쟁은 정의를 향한 열망이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분출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구조적 불의는 너무 거대하기에, 손에 잡히는 표적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는 것이 최소한의 정의라도 실현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카타르시스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퇴장해도 사회 구조는 바뀌지 않고, 비슷한 문제는 계속 발생할 것이며, 우리는 또 다음 표적을 찾아 나설 것이다.
도덕을 중시하는 사회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덕 '지향성'이 도덕 그 자체를 대체하면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따지기보다 누가 더 도덕적으로 보이느냐의 경쟁이 되면, 도덕은 권력 투쟁의 도구로 전락한다. 사람은 변할 수 있고, 과오 이후의 삶에도 의미가 있다는 상식이 설 자리를 잃는다. 이 끝없는 쟁탈전 속에서 정작 도덕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 도덕 극장의 막이 내린 후, 무대 위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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