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 문화평론가
김지미가 미국에서 85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최근에 대상포진 후유증이 있었고 직접적 사인은 저혈압 쇼크라고 한다. 작년에도 사망설이 제기됐었지만 루머로 밝혀졌고,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소식이 미국 현지에서 전해졌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별세 소식에 충격이 크다.
김지미의 본명은 김명자다. 1957년 고3 때 길거리 캐스팅이 되어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당시 극중 이름이 '지미'여서 그것을 예명으로 정했다. 1992년에 본인이 제작한 '명자 아끼꼬 쏘냐'에 '명자'를 썼다.
데뷔하자마자 서구적 미모로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그때까지의 전형적인 한국적 여성상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당시 언론이 '한국영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배우가 출현했다는 사실이 놀랍다'라고 보도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았다. 나중에 홍콩스타 왕우가 김지미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영어 이름을 '지미 왕'으로 정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인', '동양 최고 미인'이라는 말도 나왔다.
58년에 홍성기 감독의 '별아 내 가슴아'가 대히트를 하면서 일급 배우로 우뚝 섰다. 그걸 계기로 결혼에까지 이르렀지만 이혼하고 말았다. 이런 풍파를 겪으면서 일반적인 청순가련 이미지의 여배우들과는 다른 캐릭터로 부각됐다.
50년대 말부터 60년대에 이르는 시기는 한국영화 대부흥기였다. 그때 한번에 30여 편에 겹치기 출연할 정도로 한국영화 부흥기를 이끈 배우 중 한 명이었다. 출연작이 700~800여 편에 달한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작품운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61년에 홍성기 감독 김지미 주연의 '춘향전'과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큰 관심을 모았는데, 여기서 '춘향전'이 참패했다. 그래도 김지미 개인의 존재감이 워낙 압도적이어서 계속 해서 톱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라이벌이 세대교체 되어도 김지미는 여전히 '톱'이었다. 나중에 80년대에 이르러 임권택 감독과 함께 '길소뜸', '티켓' 등의 명작을 남겼다.
과거에 김지미는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렸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서구 미인의 대명사였고 8번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김지미도 서구형 미인으로 유명하며 홍성기 감독, 최무룡, 나훈아, 의사 등과 결혼과 이혼을 연이어 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린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은 일부종사해야 했다. 그러니 이혼은 상상하기 어려웠는데 김지미는 연이어 이혼을 감행하면서도 사회의 질시를 이겨냈다. 극중에서 과감하고 강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원조 팜므파탈로도 불린다. 영화계에서는 여장부라고 했다. 요즘 대두되는 걸크러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최은희가 끝없이 인내하고 순종하는 전통적 여상상의 대표였다면 김지미는 그 반대편에 있었다. 이런 모습이 당시 인습에 눌려 살던 여성들에게 대리만족을 주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결혼사에 대해 "나는 아내가 필요한 사람인데 남편을 얻었다"라고 했다.
80년대에는 당시 여성으론 보기 드물게 제작자로 성공했고, 90년대 이후엔 영화 행정에도 나섰다. 그녀는 "나는 60년 동안 배우답게가 아니라 영화인답게 살았다", "얼굴에 화장하고 누가 선택해줄 때를 기다려 주어진 역할만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자취를 돌이켜보면 김지미는 정말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고 한국 영화계에 큰 자취를 남긴 여걸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구습이 여전했던 그 시절에 '현대'를 선취한 희대의 톱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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