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은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작가, 댄서가 꿈이었던 스무 살의 청년은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보호자, 부양의무자, 가장, 효자가 됐다. 전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호칭이었다. 그 때부터 그는 2인분의 삶을 감당하며 고강도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다. 육체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 고립감과 외로움 또한 만만치 않았다. 또래들에게 가족 돌봄은 생소한 문제니 그런 고충을 토로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출판사 이매진)라는 에세이를 쓴 조기현 작가의 이야기다.
영화 '허들'(감독 한상욱)의 '서연'(최예빈)도 비슷한 처지가 된다. 서연은 아빠와 단 둘이 살고 있는 고등학교 육상선수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훈련해온 서연은 지역에서 성적도 가장 좋은 편이라 실업팀 입단이 무난해 보인다. 그러나 대형 트럭을 운전하던 아빠(김영재)가 도로에서 뇌졸중으로 의식을 잃은 후부터 서연의 일상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고, 급기야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서연이 당면한 문제점들은 조기현 작가의 경우와 유사하지만, 십대가 할 수 있는 일은 훨씬 제한될 수밖에 없다. 서연의 유일한 희망은 실업팀에 발탁되어 돈을 버는 것이지만, 거기까지 도달하는 길이 너무 험하다. 아버지를 돌보면서 학업과 운동까지 병행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데 간병인을 쓸 돈은 커녕 당장 생활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친척도, 교사도, 친구도 서연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상처만 남기는 존재들이다. 카메라는 서연에게 닥친 비극을 르포를 쓰듯 찬찬히 따라간다. 마지막 신에서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서연은 판사와 청중들에게 묻는다. "제가 아빠 보호자면, 그럼 저는 누가 보호해줬어야 해요? 저는 누구한테 보호받아요?"
'허들'은 실화를 기반으로 한 가족돌봄청년의 비극을 담은 영화이면서 복지의 사각지대를 다룬 작품이기도 하다. 서연은 실업팀에 입단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음에도 코치(이중옥)에게 실업팀이 널 원하지 않으므로 시합에 나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실업팀 관계자들이 서연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서연의 친구이자 라이벌 '민정'(권희송)의 스토리가 그들에게 더 매력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더욱이 서연은 생계를 위협을 받는 상황인데도 미성년자에다 대형 트럭이 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어 대출조차 받을 수 없다. 집안도 어렵고, 실력도 있지만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서연은 억울하기만 하다.
서연이 트랙종목 단거리 육상선수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감독은 그 중에서도 '허들'이라는 종목에 주목한다. 서연이 뛰는 100m 허들종목은 83.9㎝의 장애물을 10개 넘으면서 결승선을 통과해야 하는 경기다. 장애물을 넘어뜨린다고 해서 실격은 아니지만 그런 경우 리듬이 깨지고 속도가 줄어든다. 특히, 선수가 첫 번째 허들을 넘지 못하면 그 경기에서 좋은 기록을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간병과 생활고, 복지의 맹점 때문에 꿈까지 포기할 수밖에 없는 서연은 첫 번째 허들을 넘지 못한 육상선수와 같다. 서연의 앞에만 자기 키보다 높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조기현 작가는 주변사람들에게 종종 "아빠 정말 죽이고 싶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돌봄의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예방할 수 있었던 범죄를 유도하거나 적어도 방조한 주체가 될 수 있다. '허들'은 위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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