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하상의 기업인 열전] <25·끝> 삼성 용어의 탄생

  • 홍하상 작가·전경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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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19 06:00  |  발행일 2025-12-18
1994년 1월21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1994년 1월21일 청와대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악수하는 이건희 회장. 연합뉴스

삼성 용어란 개념과 의미의 통일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란 무엇이고, 어떤 개념이었는가. 우선 '인프라'다. 인프라라는 말을 한국 사회에 처음 등장시킨 것이 삼성이다. 인프라는 사회간접자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삼성에서 사용하는 인프라라는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뜻이 들어 있다. '해외 공장 설립 시 점검 인프라'. 즉 해외에 공장을 하나 지을 때 다음과 같은 인프라가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것이다.


①항만과 공장까지의 거리는 가까운가 ②국제공항, 더 나아가서는 국내공항과 공장까지의 거리는 가까운가 ③배후 도시로부터 노동력의 조달은 가능한가 ④값싼 전기의 공급은 원활한가 ⑤공장에 필요한 용수는 풍부한가 ⑥고속도로와 쉽게 연계할 수 있는가 등의 인프라가 일단 충족돼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프라라는 용어는 이렇게 쓰이는 것이다' 하고 교육을 한 것이다. 요즘은 그 개념이 더욱 확대돼 '어떤 사업을 구상하고 기획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조건의 총칭'을 인프라라고 부른다. 당시 삼성에서는 바로 그런 개념을 설정하고, 그걸 사원들에게 이해시켰다. 그 방법은 매일 아침 10분씩 방송되는 사내 케이블 TV를 통해서였다. 임원은 물론 전 사원이 그 방송을 보면서 개념을 익혀 나갔다. 거기에서 '질 위주의 경영' '복합화' '메기이론' '세기말 변화' '에티켓'과 같은 표현이 삼성 내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주지시켰다.


30여 년간 삼성그룹의 상징격이었던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빌딩. 연합뉴스

30여 년간 삼성그룹의 상징격이었던 서울 태평로 삼성본관 빌딩. 연합뉴스

◆복합화란 무엇인가


'복합화'란 삼성의 단지 내에 아파트, 직장, 회의실, 병원, 슈퍼마켓, 학교, 유치원, 탁아소 등 삼성 사원들이 근무하고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시설을 한꺼번에 집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그 목적은 시간을 경제적으로 쓰기 위해서다. 회의를 하기 위해 공장의 간부가 본사까지 차를 타고 1~2시간씩 걸려 오는 것은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100층, 200층의 고층 빌딩을 지어 그 안에 삼성 직원들에게 필요한 모든 시설을 넣어두고, 4~5초 만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의장에 도착하기 위한 시스템이 그가 구상한 복합화였다.


현재 복합화는 진행 중이지만, 복합화의 전신은 태평로에 있는 삼성 빌딩군이다. 삼성의 빌딩군이 위아래로 형성된 것은 사원이나 간부들이 서로 짧은 시간 안에 만나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삼성의 복합화는 1994년에 들어 태평로 일대의 삼성타운, 서울 일원동(현재의 삼성 휴먼센터 및 삼성의료원), 경기 수원 팔달구 매탄동 일대(삼성전자 지역), 용인(에버랜드 지역) 등 4개 지역을 대상 지역으로 확정하면서 더욱 박차를 가했다.


또 복합화의 개념도 '빌딩의 복합화', 즉 빌딩 하나를 작은 도시로 만들어 사무 외에 생활·문화 시설도 함께 확보한다는 개념에서 점차 확산돼 공장 복합화, 판매 복합화, 사업 복합화 등으로 확대됐다. 이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실시됐다. 즉 일본 본사, 유럽 본사, 미주 본사, 동남아 본사 등에서도 해외 지역 본사제를 도입해 공장과 사무실 등을 한곳에 모아 복합 타운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에티켓'은 본래 이건희의 취미인 골프에서 비롯된 것으로, 도덕과 예의를 갖춘 인간의 양성, 기업 문화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때 삼성에는 수백 개의 용어가 탄생했고, 그 용어집도 발간됐다. 이어 삼성에서는 이른바 '삼성 매뉴얼' '개혁 33계명'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전시 중인 유무선전화기를 살펴보는 이건희 회장. <삼성 제공>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전시 중인 유무선전화기를 살펴보는 이건희 회장. <삼성 제공>

삼성 매뉴얼


오늘날 한국에 있는 회사원 중 가장 예의 바른 사원 집단은, 내 경험상 삼성이다. 전화 응대에서부터 사무실을 방문한 손님을 대하는 자세, 명함을 주고받는 태도 등에서 삼성 직원들은 여타 기업 사원보다 앞서 있다. 심지어 거래선과 대화할 때 시선을 거래선의 오른쪽 어깨에 두도록 매뉴얼로 정해놓았다. 상대방의 눈을 빤히 바라보는 것은 상대에게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전화벨이 한 번 울렸을 때 전화를 받는 회사는 1류, 두 번 울렸을 때 받는 회사는 2류, 세 번 울렸을 때 받는 회사는 3류라는 말이 있다. 전화벨 횟수로 고객 만족도를 측정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 중시, 즉 고객에 대한 서비스가 최우선임을 사시(社是)로 삼은 것이다. 이건희가 말한 에티켓이란 바로 그런 훈련, 그런 서비스를 몸에 익히는 것이다.


1993년에 주창한 에티켓 이론대로 삼성은 새로운 기업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런 것들이 당시 신경영을 주창하며 새로 만들어진 삼성의 문화였다. 그 무렵 이건희는 직접 사원 교육에 나서 정말 많은 말을 쏟아냈다. 그것이 이른바 '지행(知行) 33훈(訓)'이다. 알고 반드시 실천해야 할 33가지다. 그중 몇 가지만 살펴본다.


삼성전자는 2009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을 정리한 지행33훈을 임원 긴급 교육 자료로 배포했다. 연합뉴스

삼성전자는 2009년 이건희 선대회장의 경영철학을 정리한 '지행33훈'을 임원 긴급 교육 자료로 배포했다. 연합뉴스

지행 33훈


①현장 책임자와 종업원들에게 진짜 서비스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야 한다. 자주 오는 손님에게는 음식을 무료로 제공한다든지, 종업원이 손님에게 실수한 경우 그에 대한 비용 및 음식을 무료로 서비스할 수 있을 정도의 권한이 있어야 한다. 손님과 가장 밀접해 있는 현장 종업원들이 손님의 불평을 듣는 즉시 보고하는 습관을 갖도록 교육시키고, 이러한 종업원의 보고와 회의 내용이 즉시 사장에게 보고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②뒷다리 잡는 사람을 100명 중 1명쯤 잡아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스태프로 일하는 사람도 신나고 활기에 차 아이디어도 속출한다.


③나의 철학은 최소의 양에서 철저히 질을 중시해 이미지를 높이고, 완벽하게 소비자·종업원·협력업체를 위한 질 위주의 경영을 하면 저절로 이익이 나게 돼 있다는 점이다. 저절로 이익이 나면 그때 스케일이 커진다. 증설하니까. 그런데 이런 선후를 완전히 망각하고 무턱대고 투자, 투자만 해왔다. 중앙집권형, 즉 상의하달에서 끝났기 때문이다.


④고객 중시가 무엇인가. 고객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사는데 말로만 고객 중시를 하고 있지, 고객에게 정말로 신경을 쓰고 있는가. 레이더가 고객을 향해야 하는데 나를 향해 있다. 이것을 고객 쪽으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바로 고객 중시다.


⑤21세기는 문화의 시대이자 지적 자산이 기업의 가치를 결정짓는 시대다. 기업도 단순히 제품을 파는 시대를 지나 기업의 철학과 문화를 파는 시대가 됐다. 디자인과 같은 소프트한 창의력이 기업의 소중한 자산이자 21세기 기업 경영의 최후 승부처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⑥우리 그룹을 깊이 들여다보면 중공업 같은 것은 18~19세기 업종인데도 지금 쩔쩔매고 있으며, 또 '싱글 삼성'이라고는 하지만 싱글로 가기에는 각 사별 차이가 너무 크다. 금년 내 모든 것을 완벽히 결정해 없앨 것은 없애고, 줄일 것은 줄이며, 합병할 것은 합병하고, 남는 힘을 앞을 내다보며 미래 사업을 위해 준비해 가야 한다.


⑦천재 교육을 반드시 해야 한다. 2~3세기 전에는 10만명, 20만명이 군주와 왕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금은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 20만명을 먹여 살린다. 천재가 소프트웨어 하나를 개발하면 1년에 수십억 달러를 벌어들이고 수십만 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⑧위기는 내가 제일이라고 생각할 때 찾아온다. 발전이 없는 현재는 자만심 찬 퇴보다.


⑨나부터 변하자. 모든 변화의 시발점은 자기 자신이다. 나부터 변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스스로 변하려면 남들은 하지 않더라도 한 번 해보겠다는 배짱이 있어야 한다.


⑩정치인은 주기적으로 선거를 통해 심판받지만 기업인은 매일매일 시장에서 소비자의 심판을 받는다. 고객 만족은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면 망하는 것'이다. 특히 까다로운 고객은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가르쳐 주는 고마운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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