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보람의 스포르찬도] 베토벤의 ‘황제’

  • 남보람 전쟁사학자·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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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1-13 06:00  |  발행일 2026-01-13
남보람 전쟁사학자·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남보람 전쟁사학자·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1792년 베토벤은 고향인 독일 본을 떠나 오스트리아 빈으로 거처를 옮겼다. 파리발(發) 혁명의 포성을 피하고, 거장 하이든에게 사사받기 위해서였다. 전화(戰火)는 들불처럼 유럽 전역에 번졌다. 혁명 물결이 구체제를 휩쓸자 궁정음악가였던 베토벤의 정치·경제적 기반도 무너졌다. 청력에 심각한 이상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02년에는 대화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가 패배하자 귀족들의 작곡 후원이 대부분 끊겼다. 오스트리아가 승복하지 않고 설욕전을 준비하면서 상황은 더욱더 나빠졌다.


1809년, 기회가 왔다. 나폴레옹과 그의 주력 부대가 스페인 전장에 발 묶인 틈을 타, 20만 대군을 모은 오스트리아가 프랑스군의 배후를 공격했다. 빈은 승전보를 기다리며 들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번개 같은 속도로 돌아와 오스트리아 군대를 짓밟았고, 제5차 대프랑스 전쟁은 패배로 종결되었다. 빈에 묶인 베토벤의 생애는 시대적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는 편지에 '음악적 진전이 없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썼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E플랫 장조, 작품 73'(1809년 완성)이 탄생한 배경이 이와 같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은 2년여 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 군대의 개선에 맞춰 초연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루돌프 대공에게 바칠 헌정이었다는 점을 떠올릴 때 더욱 그렇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으니 모든 것이 어긋났다.


1811년 말에 겨우 라이프치히에서 초연을 하였으나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1812년 초, 빈에서 재차 공연을 열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에 대해 '웅장한 곡의 표현이 듣는 이로 하여금 전쟁의 포성을 연상시켰을 것'이라는 평이 남아 있다. 승전을 상정한 곡의 이모저모가 전쟁 혐오에 빠진 청중의 정신적 상흔을 자극했던 것일까. 작가 로맹 롤랑의 표현에 의하면 이 시기의 베토벤은 '극단적 위기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당대 평론가들의 반응이 남달라 주목을 끈다. 그들은 시대적 불운이나 대중의 냉담과 무관하게 곡의 가치를 꿰뚫어 보았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중에 가장 웅장하고 장대한 구조, 위상, 스케일'을 지니고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말마따나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의 표현 세계는 베토벤이 처한 절망적 상황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는 긴장과 장엄을 의도적으로 교차시키고, 확신과 희망을 단계적으로 연쇄한다. 그리하여 청자들은 개별 감각에 휩쓸리지 않고, 위엄과 통제가 유지되는 정서적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공공적 정동(情動)' 즉, 음악을 통해 시대와 창작자와 청중이 공진(共振)하는 높은 수준의 예술적 기능이다.


1819년 2월 베토벤은 이렇게 적었다. "훌륭하게, 고귀하게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 힘으로 어떤 불행도 견뎌낼 수 있음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 이러한 불굴의 품격이 낳은 대표적 걸작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이다. '황제 나폴레옹'은 군대를 몰고 와 베토벤의 예술 공간을 빼앗았다. 1809년 빈을 덮친 프랑스군의 포성은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베토벤을 압박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제국의 전쟁 폭력이 강제한 불안, 긴장, 분노뿐 아니라 포성, 비명, 울음을 포용하여 예술적 형식과 리듬으로 승화시켰다. 우리가 '피아노 협주곡 제5번'을 '황제'라고 부르는 사유가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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