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역적으로 죽고, 의리로 남았다…금성대군의 영주

  • 권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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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21 20:35  |  발행일 2026-03-21
죽동(지동)분기점에서 300m 남짓 떨어진 논 한가운데 자리한 부부인당. 권기웅 기자

죽동(지동)분기점에서 300m 남짓 떨어진 논 한가운데 자리한 부부인당. 권기웅 기자

경북 영주 순흥과 이산면 일대에 남은 금성대군의 흔적은 단종 복위 운동이 한 왕자의 정치적 결단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끝내 임금을 버리지 않은 의리, 남편을 잃고도 이름으로 남은 부부의 사랑, 수백 년 동안 제향으로 충절을 기억해 온 마을 사람들의 비통한 마음이 겹겹이 배어 있다.


금성대군은 1457년 순흥도호부로 유배된 뒤에도 단종 복위의 뜻을 접지 않았다. 순흥부사 이보흠과 거사를 도모했지만, 시녀 김련과 관노의 밀고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풍기현감 김효급의 보고가 이어졌고, 금성대군은 결국 사사됐다. 단종의 장인 송현수도 처형됐다. 복위의 불씨가 꺼지자 단종도 끝내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어린 임금을 향한 충정은 역모로 기록됐고, 왕실의 피로 이어진 의리는 참혹한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사공정길 영주시 문화예술과 학예사는 "피끝마을과 금성대군신단, 고치령에 이어 이산면 흑석사와 죽동분기점 부부인당에도 단종 복위의 비극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장에 서면 역사는 기록보다 먼저 풍경으로 다가온다. 죽동(지동)분기점에서 300m 남짓 떨어진 논 한가운데 자리한 부부인당은 바람을 막아줄 나무 한 그루 없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예전에는 북바위에 기대어 있었지만, 성황당 정비 과정에서 바위가 깨지며 자리는 더 스산해졌다.


금성대군이 사사될 당시 피 묻은 돌(혈석)을 모시고 제를 올리던 금성당이 지금의 단산 두레골로 옮겨졌다. 권기웅 기자

금성대군이 사사될 당시 피 묻은 돌(혈석)을 모시고 제를 올리던 금성당이 지금의 단산 두레골로 옮겨졌다. 권기웅 기자

부부인당(拜夫人堂)은 이름부터 애틋하다. '부부인'은 대군의 부인을 뜻한다. 곧 금성대군의 아내를 기리는 당이다. 본래 이곳은 금성대군이 사사될 당시 피 묻은 돌(혈석)을 모시고 제를 올리던 금성당이 있던 자리였다. 금성당이 지금의 단산 두레골로 옮겨간 뒤에도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남아 금성대군의 부인을 위해 제사를 이어왔다. 권력은 한 왕자를 죄인의 이름으로 지웠지만, 민간의 기억은 남편을 잃은 여인의 슬픔까지 함께 붙들고 있었던 셈이다.


금성당의 내력도 비극적이다. 금성대군이 죽고 순흥도호부가 폐지된 뒤, 도호부가 회복될 무렵 죽동마을 이순달의 꿈에 금성대군이 나타나 "내 피가 묻은 돌이 마을 앞 냇가에 있으니 거두어 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마을 사람들은 죽계에서 혈석을 찾아 북바위 성황당에 모셨고, 이것이 금성당의 유래가 됐다. 이후 양반들까지 나서 해마다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왕실이 지켜주지 못한 충절을 지역 공동체가 기억으로 떠받든 것이다.


하지만 금성당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구한말 의병을 토벌하기 위해 들어온 군대가 금성당을 짓밟았고, 일제 군인들이 그곳에서 취사를 하고 배설까지 했다는 전언도 남아 있다. 충절을 기리는 공간마저 모욕당한 것이다. 이후 다시 꿈에 나타난 금성대군이 더 조용하고 정결한 곳으로 옮겨달라고 했고, 금성당은 현재의 두레골로 자리를 옮겼다. 제향 주체 역시 순흥의 독특한 향촌자치 조직인 초군청으로 이관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국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영주 흑석사에 자리하고 있다. 권기웅 기자

국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영주 흑석사에 자리하고 있다. 권기웅 기자

이 비극은 흑석사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확인된다. 영주 흑석사 국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금성대군이 사사된 직후인 1458년 조성된 불상이다. 복장기와 시주기에는 의빈궁 권씨, 명빈궁 김씨, 효령대군, 정의공주, 연창위 등 왕실 인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특히 의빈궁 권씨는 금성대군을 길렀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사공 학예사는 "이 불상은 단순한 왕실 발원 불사를 넘어, 피로 얼룩진 정치 격변 뒤 왕실 내부의 상처와 죽음을 불교적으로 위무하려는 흔적으로도 읽힌다"고 했다.


표면적으로 복장기에는 임금의 무병장수, 왕비와 세자의 장수, 종실의 안녕,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나 조성 시점이 금성대군 처형 직후라는 점, 그리고 시주자 구성에 금성대군과 인연이 깊은 왕실 인물들이 포함돼 있다는 점은 이 불상이 단순한 국태민안의 기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왕실은 공식 기록으로는 체제 안정을 말했지만, 불상 안쪽 복장과 시주의 이름들에는 비극적 죽음 이후의 애도와 속죄, 위무의 정서가 겹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사공 학예사의 설명이다.


영주에 남은 금성대군의 흔적은 그래서 더 아프다. 복위 운동은 실패했고, 충절은 역모로 몰렸으며, 사랑은 부부인당이라는 쓸쓸한 이름으로만 남았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혈석을 거두고, 제향을 이어가고, 부부인을 따로 모시며 한 시대의 상처를 기억해 왔다. 금성대군의 이야기는 단순한 왕실 비사나 지방 전설이 아니다. 단종 복위를 꿈꾸다 스러진 한 왕자의 삶은 끝났지만, 그를 둘러싼 의리와 사랑, 충절의 기억은 영주 땅 위에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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