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금닭이 품은 무릉도원, 봉화 청암정과 석천계곡을 걷다

  • 황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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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13 13:04  |  발행일 2026-03-13
바위 위에 핀 정자, 계곡에 흐르는 풍류
금닭이 품은 길지(吉地)…봉화 닭실마을 청암정과 석천계곡에서 만난 500년 풍류
울창한 소나무 숲과 맑은 계류가 어우러진 봉화 석천계곡 전경. 황준오기자

울창한 소나무 숲과 맑은 계류가 어우러진 봉화 석천계곡 전경. 황준오기자

골짜기에는 물이 흐르고, 바위 위에는 정자가 앉아 있다. 세월은 흘렀지만 풍경은 좀처럼 늙지 않는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일명 '닭실마을'. 산세는 높지 않지만 마을을 둥글게 감싸 안고, 계류는 마을 곁을 따라 조용히 흐른다. 이곳에 들어서면 묘하게 시간의 속도가 느려진다. 바람은 낮게 흐르고, 발걸음은 자연스레 조심스러워진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을 영남의 대표적인 길지로 기록했다. 물이 흐르고 산이 감싸는 지형, 농사와 거주가 조화를 이루는 환경이 사람 살기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라는 평가였다. 풍수에서는 이를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라 불렀다. 금빛 닭이 알을 품듯 산이 마을을 감싸 안은 형국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닭실마을에 들어서면 그 표현이 과장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낮은 산과 넓지 않은 들, 그리고 오래된 집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다. 화려함은 없지만 마을 전체에서 묘한 안정감이 흐른다. 오랜 세월 선비 문화가 뿌리내린 마을 특유의 기품이다.


마을 중심에는 이 풍경을 상징하는 정자가 하나 서 있다. 바로 청암정(靑巖亭)이다.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봉화 청암정(靑巖亭) 모습. 황준오기자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진 봉화 청암정(靑巖亭) 모습. 황준오기자

청암정은 1526년(중종 21년), 조선 중기의 학자 충재 권벌이 벼슬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와 조성한 정자다.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발 물러난 선비가 학문과 사색을 위해 마련한 공간이었다.


이 정자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은 건물이 놓인 자리다. 일반적인 정자처럼 기단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다. 바위의 형상이 거북이 물 위로 올라온 모습과 닮았다고 해 '거북바위'라 불린다. 정자는 그 위에 얹혀 있고, 주변으로 물길이 돌아 작은 연못을 이룬다.


돌다리를 건너 정자에 오르면 풍경이 달라진다. 물이 정자를 한 바퀴 감싸 흐르고, 주변의 나무와 바위가 자연스럽게 배경이 된다. 인공 정원이 아니라 자연 자체가 정원이 된 공간이다.


청암정에는 한 가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처음 정자를 지을 때 온돌방을 들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바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를 거북바위가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내는 울음이라 여긴 권벌 선생이 아궁이를 없애고 마루로 고쳤다는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일화는 조선 선비들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청암정을 지나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 또 하나의 풍경이 펼쳐진다.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석천계곡이다.


계곡 깊숙한 곳에는 석천정(石泉亭)이 자리한다. 권벌의 장자인 권동보가 부친의 뜻을 이어 세운 정자다. 아버지가 마을 안에서 학문을 닦았다면, 아들은 계곡 속에서 자연과 더욱 가까운 삶을 선택한 셈이다.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자리한 고택 전경. 황준오기자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에 자리한 고택 전경. 황준오기자

정자 주변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와 닮았다.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계류, 그 위를 스치는 바람, 그리고 숲 사이에 놓인 작은 정자 하나. 인공과 자연의 경계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계곡 바위에는 '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푸른 안개가 깃든 신선의 세계라는 뜻이다. 실제로 이곳에 서면 세속의 소음이 멀어지고 물소리와 바람 소리만 남는다.


청암정과 석천계곡 일대는 이러한 역사적·경관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국가 명승 제60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이곳의 진짜 가치는 지정 여부를 넘어선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풍경 속에 스며들 듯 건축을 세운 선조들의 태도, 그리고 그 공간 속에서 이어진 선비 문화가 함께 만들어낸 인문 풍경이기 때문이다.


청암정의 돌다리를 건너고 석천계곡 숲길을 걷다 보면 문득 발걸음을 멈추게 되는 순간이 있다.


거북바위 위에 앉은 정자가 조용히 말을 건네는 듯하다.


세상을 이기려 애쓰기보다 때로는 흐르는 물처럼 잠시 멈추고, 자연 속에서 자신의 중심을 찾는 것이 더 큰 지혜일지도 모른다고.


닭실마을의 시간은 그렇게 500년째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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