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군 지보면에 있는 말무덤은 인간이 남긴 언어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상징적 공간이다. <장석원기자>
회색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10일 오후, 경북 예천군 지보면의 들녘 한가운데 붉은 표지석 하나가 시선을 붙든다. '말무덤(言塚)'.
말무덤은 인간이 남긴 언어의 흔적을 되돌아보는 상징적 공간이다.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었던 말, 지키지 못한 약속, 혹은 가볍게 던졌지만 오래 남은 말들. 이곳은 그런 말들을 '묻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원형으로 배치된 돌들은 일종의 의식 공간처럼 보인다. 각각의 돌에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어 방문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하게 만든다.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언어의 흔적을 담은 기록물인 셈이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있는 말무덤 주변 입에 손가락을 댄 형상은 '침묵'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말의 책임을 강조하는 상징이다. <장석원기자>
특히 입구에 세워진 조형물은 이 공간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입에 손가락을 댄 형상은 '침묵'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말의 책임을 강조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조윤 예천문화원장은 "말무덤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라 지역이 품고 있는 '언어의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이다"면서 "특히 오늘날처럼 말이 빠르게 소비되는 시대일수록, 한마디의 무게를 되돌아보는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든 일상이든 결국 신뢰는 말에서 출발하는 만큼, 이곳이 지역사회 전반에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의미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있는 말무덤 주변 돌에는 짧은 문장이 새겨져 있어 방문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투영하게 만든다. <장석원기자>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 이곳의 이름은 단순한 조형물 이상의 의미로 다가온다.
지역 곳곳에는 각종 공약과 메시지가 쏟아지고 있다. 후보자들은 저마다 변화를 약속하고,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시선은 예전만큼 단순하지 않다.
주민 조현주(64) 씨는 "여기 와보면 괜히 말 한마디라도 더 신중하게 하게 된다"며 "정치하는 사람들도 한 번씩 와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말이 곧 권력이다. 한 문장, 한 표현이 여론을 움직이고, 때로는 지역의 미래를 좌우한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과 어긋나거나 지켜지지 않을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에게 돌아온다.
이 같은 맥락에서 말무덤은 단순한 체험 공간을 넘어 문화적·학술적 의미를 함께 지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재완 예천박물관장은 "말무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를 기록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문화 자산"이라며 "전통적으로 비석이나 유물은 눈에 보이는 것을 남겼다면, 이 공간은 사라지는 말과 기억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충분한 사례"라고 평가했다.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말무덤 입구 모습. <장석원기자>
최근 지역 정가에서는 공약의 실현 가능성과 진정성을 두고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표를 얻기 위한 언어와 실제 정책 사이의 간극이 반복되면서, 유권자들의 피로감도 커지고 있다.
말무덤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조용히 메시지를 던진다. 말을 줄이라는 것이 아니라, 말의 무게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이곳에는 화려한 시설도, 관광객을 끌어모을 장치도 없다. 대신 이곳에는 '침묵'이 있다. 그리고 그 침묵은, 어느 정치인의 연설보다 더 강한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말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말은, 과연 지켜질 것인가.
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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