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사 지나 모퉁이를 돌면 유채꽃과 함께 작은 자갈 해변이 나타난다. 대본 해안길은 여기까지다.
그늘이 감미로워지는 정오였다. 바다로부터 달려온 바람이 부드럽게 휘청거렸고 배들은 가만히 삐거덕거리며 내항의 가장자리로 고요를 모아들이고 있었다. 바다는 비현실적으로 짙은 파랑이었다. 수평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새도 없고 비린내도 없이 어처구니없게도 젖은 꽃 같은 냄새가 차올랐다. 숲 속의 빈터에 숲의 향기가 모이듯, 모래와 바위와 흙과 집들의 모든 모서리로부터 뭉클한 향기가 뿜어져 나와 항구로 모여드는 것 같았다.
가곡항. 가곡은 감포읍 대본리의 중심마을로 국가어항인 감포항을 제외하고 동경주 16개 어촌계 가운데 어선 수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 한다.
◆ 가곡항
대본1리 마을표석이 도로가 전봇대 아래에 나뒹굴려져 있다. 생채기 많은 표면에 새겨진 글씨가 단정하다. 10m 쯤 떨어진 도로가에 옛것보다 열 배는 큰 마을 표석이 두둥 서 있다. 대본1리 가곡. 그 옆으로 '가곡항 활력센터' 건물이 막바지 작업 중이다. 가곡(家谷)은 감포읍 대본리의 중심마을이다. 옛날에는 '집실(執室)'이라 불렸다.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뜻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국가어항인 감포항을 제외하고 동경주 16개 어촌계 가운데 어선 수가 가장 많은 마을이라 한다. 내항이 커서 호수 같다. 세어보니 정박된 배가 서른 척쯤 된다. 해녀도 십 수 명이 활동한다는데 이리저리 기웃거려도 낌새를 못 찾겠다. 조용하다. 등대 아래 방파제에서 낚시 중인 두 사람 뿐, 이방인은 나 혼자다.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조씨할매집'이라는 작은 간판이 자꾸 눈에 걸린다. 2대째, 50년 넘게 '상어 두치'를 만드는 집이라 한다. '두치'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 본다. 쉽게 이해하자면 상어 수육이다. 두치 중에 가곡의 두치가 제일이고, 경주와 울산의 장례식장과 결혼식장에서 많이 쓴다고 한다.
가곡 제당과 400년 된 곰솔 당목. 해마다 음력 6월 1일에 동제를 지낸다. 고사하여 베어진 할매 소나무가 푸른 천에 덮여 있다.
리모델링한 공동작업장과 풍력·태양광을 같이 이용하는 하이브리드 안심가로등. 가곡항은 2022년 '어촌뉴딜300' 사업에 선정되어 올해 6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조씨할매집'과 마을회관 사이에 '가곡제당'이 있다. 넉넉한 한 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올린 당당한 모습이다. 붉은 기둥 앞에 제당을 기증한 이의 공적비가 반들반들하다. 제당 옆에는 할매, 할배 소나무라고 불리는 400년 된 곰솔 당목이 있다. 할매 소나무가 베어져있다. 몇 달 혹은 며칠 사이에 벤듯하다. 할매 소나무는 4년 전 즈음 말라 죽었다고 한다. 이후 할배 소나무도 할매 소나무 따라 말라 죽었다고 한다. 잘려진 할매 소나무는 푸른 천에 덮여 있다. 제당 벽화 속 큰 소나무 아래에 할매와 할배가 손잡고 앉아 계신다. 할배 소나무를 베지 않은 것은 아직 희망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디 사십시오. 할배 소나무는 핏기 없는 앙상한 가지로 나마 하늘을 붙잡은 채 여전히 훌륭한 줄기로 상체를 일으키고 있다.
어디선가 잉잉 소리가 난다. 물량장의 가로등 꼭대기에서 장난감 비행기 같은 프로펠러가 몰래 바람을 모으고 있다. 풍력과 태양광을 같이 이용하는 하이브리드 안심가로등이라 한다. 가곡항은 2022년 '어촌뉴딜300' 사업에 선정되어 올해 6월 준공을 앞두고 있다. 북방파제 보강, 어촌계 공동작업장 리모델링, 가곡 활력센터 조성, 해변마당 정비, 마을 정주환경 개선, 안전조명 설치 등이 지금까지 진행해 온 사업의 세부로 대부분 완료된 상태다. 활력센터에 전망 포차가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몇 달 후 가곡항은 또 달라져 있겠다.
가곡항 입구에서 도로를 건너면 가곡천 골 따라 마을이 이어진다. 천변 울타리에 화분이 걸려 있다. 어촌뉴딜 사업으로 가곡천도 정비되었다.
◆ 가곡천 골짜기의 마을
가곡항 입구에서 도로를 건너면 가곡천 골 따라 마을이 깊이 이어진다. 가곡천은 폭이 약 6m, 길이는 600m 정도 된다. 평소에는 물이 없는 건천인데 비가 오면 뒷산 계곡에서 빗물이 흘러내려와 바다로 빠져나간다. 물의 흐름은 느껴지지 않지만 모처럼 푸른 하늘이 파랗게 담길 정도로 잔잔하게 누워 있다. 가곡천은 2003년 9월 태풍 '매미' 때 범람했다. 저지대 주택 마당이 침수될 정도였다고 한다. 2016년 태풍 '차바' 때는 범람한 물이 방 안까지 차올라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 오래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어촌뉴딜 사업으로 가곡천도 정비된 것 같다. 천변 울타리에 화분이 걸려 있다. 무슨 꽃들이 피어날까. 어디선가 날아온 민들레가 제 집 마냥 꽃을 피웠다.
골짜기의 끝자락에는 혁신 원자력 연구단지가 커다랗게 자리한다. 예전 가곡마을은 들이 넓었고 농사를 지어서 얻는 수입이 고기잡이보다 나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들의 대부분이 원자력 연구단지에 편입되었다. 더 이상 농사는 짓지 않지만 모든 집들의 모서리마다 텃밭과 꽃밭이 지극하다. 천에서 훌쩍 물러나 새로 지은 듯한 집 마당에는 영산홍과 동백, 조팝나무와 붓꽃이 피어 있다. 저 한 평 마당의 커다란 붉은 꽃은 모란일까 작약일까. 커다란 붉은 꽃 아래 엄나무 조각들과 호박잎, 미역귀 따위가 빨래와 함께 말라가고 있다. 몇몇 집 문간에는 엄나무가 자란다. 무시무시한 가시를 가진 나무, 엄흥도의 넋이 엄나무가 되어 단종을 지킨다는 전설의 그 나무다. 감포의 민속에 관한 논문을 보면 이는 가곡의 벽사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집안에 나쁜 귀신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대문 입구에 엄나무를 심는다는 것이다. 꽃은 7~8월에 연노랑으로 피는데 꽃말이 '경계' 또는 '방어'다. 나로서는 엄나무의 새순인 개두릅에만 정신이 쏠려 있다. 지금은 잎이 무성해 톡 따 먹을 만한 순이 겨우 하나 쯤 보인다.
작은 방파제 남쪽으로 굵은 모래 해변이 둥글고 길다. 해변을 따라 친수스탠드와 해변마당이 정비되어 있다.
큰 방파제 북쪽으로 몇 채의 집이 이어지고 방파제 보강용 테트라포드가 마을을 보호한다.
국도변에 자리한 해동일출대관음사의 지하가 바닷가 노천 법당이다. 해변은 일출과 방생, 숨겨진 차박 명소로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 남쪽은 굵은 모래밭, 북쪽은 갯바위와 자갈해변
작은 방파제 남쪽으로 굵은 모래 해변이 길게 곡지다. 남쪽 끝에 보이는 곶은 대본말이다. 곶 위에 해안초소가 등대 같고 탑 같고 정자 같다. 대본말 일대는 대본2리 회곡(檜谷) 마을이다. 주민의 절반 이상이 농사를 짓고 3할 정도가 어업인이다. 회곡의 선주들은 가곡항을 함께 이용하고 어촌계도 공동으로 운영한다. 바다는 잔잔하고 아주 짙은 청색이다. 약간 비현실적으로 파랗다. 약 650m 정도 떨어진 가곡 앞바다 속이 암반이라 한다. 수심이 5m도 안 된단다. 게다가 1㎞ 해상의 거의 대부분 지역에 인공어초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모두 조심하느라 바다가 이리 잔잔한가 보다.
큰 방파제 북쪽으로 몇 채의 집이 이어진다. 도로 옆 트라이포드로 보호된 해변은 덕장 같다. 파도소리 들으며 피크닉하기에도 좋겠다. 조금 더 나아가면 갯바위 지대다. 왼쪽은 비탈진 흙벽이고, 풀숲이고, 옹벽이고, 어느 건물의 지하다. 저 위로는 국도가 지나가고 식당과 펜션과 카페 등이 도로 따라 늘어서 있다. 해변 길은 차 한 대가 지나갈 만큼의 너비지만 오솔길이라 부르고 싶다. 차 소리도 건물들의 위용도 전혀 다른 세계인 듯 그저 파도소리와 함께 꽃들 쪽으로 손 뻗듯 나아가는 오솔길이다. 길 가에 미륵불이 서 계신다. 그늘 속에는 관세음보살이 앉아 계신다. 오늘도 내일도 든든 하라는 듯. 길 따라 갯무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다. 꽃잎 끝이 연보랏빛으로 물든 하얀 갯무꽃들은 연신 우아하게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가볍게 튀어오르는 귀여운 짓을 한다. 완만하게 굽이진 모퉁이 너머로 유채꽃이 쏟아진다. 작은 자갈해변이 갈매기처럼 몰려든다. 어디선가 사나이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무엇에도 유혹당하지 않은 채 묵묵히 해변을 청소한다.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경주IC로 나가 직진한다. 배반네거리에서 우회전해 직진, 영불로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약 1.5㎞ 직진하다 감포 방향으로 우회전해 간다. 토함산 터널 지나 줄곧 직진하면 감포 바다가 보인다. 나정교차로에서 우회전해 31번 국도를 타고 3㎞ 정도 남하하면 도로 왼쪽에 대본1리 가곡 마을 표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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