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다연 새마을문고 대구북구 이사·동명농산 대표
새벽 4시. 매천시장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가게 문을 연다. 평생 마늘을 만지며 살아온 내게 일상은 알싸한 향이 베인 노동의 연속이다. 그런 하루 속에 다시 펼쳐 든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는 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내게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이 소설은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영국인이 선물한 '춤추는 강철 벼룩'에서 시작된다. 보이지 않는 태엽으로 움직이는 서구의 정교한 기술 앞에 러시아 황제와 조정은 경탄하지만, 동시에 자존심을 시험받는다. 플라토프 장군은 툴라의 무명 장인들에게 이를 맡기며 더 뛰어난 결과를 요구하고, 그 중심에 이름조차 없는 '왼손잡이'가 서 있다.
그들이 내놓은 결과는 뜻밖이다. 벼룩은 더 이상 춤추지 않는다. 대신 왼손잡이는 현미경도 없이 벼룩의 발 하나하나에 편자를 박아 넣었다. 그 작은 편자에는 장인들의 이름까지 새겨져 있었다. 서구의 과학을 넘어서는 정교함을 투박한 손끝으로 구현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성취는 곧 비극으로 이어진다. 영국에서 환대를 받았던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만, 정작 그를 기다린 것은 관료주의의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남긴 충언마저 외면당한 채, 한 장인의 삶은 조용히 사라진다.
이 장면에서 나는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매천시장에서 마늘의 결을 살피고 단단함을 가늠하는 나의 일 또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드러나지 않는 노동일지라도, 삶의 기초를 지탱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름이 남지 않는 자리에서도 한 사람의 시간과 손끝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책 속에 길이 있다고 믿어왔다. 이 책에서 장인이 박아 넣은 작은 편자는 비록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을지라도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존엄을 증명해낸다. 마늘을 사고파는 매천시장의 일상 또한 마찬가지다. 투박한 손마디에 새겨진 삶의 흔적은 우리 각자가 인생이라는 편자에 정성껏 새겨 넣은 이름들이다.
그래서 고전은 오래 살아남는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고뇌와 존엄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삶 역시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고전은 그 당연하지만 쉽게 잊히는 사실을 다시 붙잡는 힘이 있다.
오늘도 나는 마늘 향 가득한 시장으로 향한다.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않더라도, 왼손잡이가 그랬듯 나의 망치질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낡지 않는 가치는 화려함이 아니라, 시대를 견디며 본질을 벼리는 사람의 진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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