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 기성면 구산항에 세워진 대풍헌 모습.<원형래기자>
동해의 푸른 바다가 펼쳐진 경북 울진군 기성면 구산항.잔잔한 포구 한켠에는 오래된 한옥 건물 하나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름은 '대풍헌(待風軒)'. 얼핏 보면 평범한 옛 정자처럼 보이지만 이곳은 조선시대 울릉도와 독도를 향하던 수토사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역사 현장이다.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라는 뜻의 대풍헌은 조선 수토사들이 풍랑을 피해 출항 시기를 기다리던 장소다. 현재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으며 동해 영토수호 역사와 울릉도·독도 연구의 핵심 현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울진 기성면 구산항에 대풍헌 바로 앞에 독도 모형의 모습.<원형래기자>
■ 안용복 사건이 만든 조선의 수토정책
대풍헌 역사의 출발점은 1693년 안용복 사건이다. 당시 울산 출신 어부 안용복은 동료들과 울릉도에서 조업하다 일본 어민들에게 납치돼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 과정에서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강하게 주장했고 이후 일본 막부 역시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조선 정부는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국가 차원의 관리 필요성을 절감했다.결국 1694년 장한상을 최초의 수토사로 파견하며 울릉도·독도 수토정책을 본격 시행하게 된다.
향토사 연구가 심현용 박사는 "수토정책은 단순 순찰이 아니라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는 증거"라며 "정기적으로 관리와 감시를 실시한 것 자체가 국가 영토 운영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수토사들이 이배로 울릉도로 왕래했던것으로 추정한 배.<원형래기자>
■ 울진 구산항, 수토사들의 핵심 출항기지
조선 정부는 이후 삼척영장과 월송만호가 번갈아 울릉도를 순찰하는 '윤회수토제'를 실시했다. 초기에는 강원도 삼척 정라진과 장호항 등 여러 항구에서 출항했지만 약 100년 동안 항해 경험이 축적되면서 울진 구산항이 가장 안전한 항로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동해 조류와 계절풍을 고려할 때 울진에서 울릉도로 향하는 항로가 가장 안정적이었던 것이다.심 박사는 "처음에는 삼척에서도 많이 출항했지만 결국 대부분의 수토사들이 울진에서 출발하게 된다"며 "그 중심 공간이 바로 대풍헌이었다"고 말했다.
수토사들은 울릉도로 떠나기 전 기상 상황을 살폈다. 동해는 풍랑이 심하고 날씨 변화가 거세 강풍이 불면 배를 띄울 수 없었다. 그때 수토사들이 머물며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던 공간이 바로 대풍헌이다.
실제 기록에도 삼척영장이 대풍헌에서 머물다 울릉도로 출항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심 박사는 "대풍헌이라는 이름 자체가 조선 수토사의 역할과 기능을 그대로 담고 있다"며 "단순한 정자가 아니라 동해 영토수호의 현장이었다"고 강조했다.
전시관에 배치된 1883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토절목(搜討節目)'과 '완문(完文)' 지침서.<원형래기자>
■ 동해안 유일의 수토 관련 건축물
현재 대풍헌은 동해안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수토 관련 건축물로 평가된다. 삼척 지역에도 과거 관련 시설이 있었지만 항만 개발과 도시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고 현재는 기록만 전해진다.
반면 울진 대풍헌은 비교적 원형이 남아 있었고 이후 해체 복원 작업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복원 과정에서는 수토사 관련 현판과 고문서, 완본 형태의 수토 문헌 등이 발견되며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기존 사료에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들까지 확인되면서 역사적 가치도 더욱 높아졌다.
대풍헌의 역사적 가치는 건축물 자체를 넘어 내부에 보관됐던 고문서에서 더욱 빛난다. 1883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토절목(搜討節目)'과 '완문(完文)' 등은 수토사 파견 시 소요되는 경비 조달 방법과 주민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관아의 지침을 상세히 담고 있다.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1호로 지정된 이 문서들은 19세기까지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경북 울진 온정면 외선미 일대 선정비 가운데 하나에 새겨진 '평해군수 겸 울도첨사'라는 기록 탁본.<원형래기자>
■ "평해군수 겸 울도첨사"…울진과 울릉도 연결한 선정비
울진에는 대풍헌 외에도 울릉도 행정체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 남아 있다.
경북 울진 온정면 외선미 일대 선정비 가운데 하나에 새겨진 '평해군수 겸 울도첨사'라는 기록이다.
이는 조선 고종 시기 평해군수가 울릉도 행정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핵심 자료다. 실제 《고종실록》 기록과도 정확히 연결된다.
즉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정부 공식 행정체계 안에서 관리됐으며 그 중심에 울진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 선정비는 한때 훼손될 위기를 겪기도 했다.
과거 마을 한복판에 세워져 있던 비석 3기가 어린아이 사고 이후 주민에 의해 도끼로 파괴되면서 조각난 채 오랜 기간 방치됐던 것이다.
심 박사는 "민간 시절부터 이 비석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며 "반드시 복원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건의한 끝에 결국 예산을 확보해 복원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 약 2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비석 조각을 다시 접합하고 복원했으며 최근에는 보존처리와 탁본 작업도 완료됐다.
탁본은 비석 글자를 종이에 떠내는 전통 기록 방식으로 원문이 훼손되더라도 내용을 후대에 남길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 보존 기법이다.
현재 탁본 자료는 전시를 통해 공개되고 있으며 향토사와 독도 연구의 핵심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울진군 학예연구사 심현용 박사가 대풍헌 건물 안에서 인터뷰 하는 모습.<원형래기자>
■ "아무도 안 해서 직접 시작했다"…15년 이어진 수토사 연구
심현용 박사의 수토사 연구 역시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원래 신라 고고학 전공자인 그는 울릉도 고고학 조사 과정에서 대풍헌과 수토사 자료의 역사적 가치를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심 박사는 "처음에는 제 전공 분야도 아니었고 독도·울릉도 문제에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며 "그런데 자료를 보다 보니 너무 중요했다. 아무도 연구를 안 하길래 결국 직접 시작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후 15년 넘게 관련 자료를 조사하며 울진과 울릉도·독도를 연결하는 수토사 연구를 이어왔다.특히 조선시대 울릉도 고고학을 체계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 수준의 논문까지 발표하며 관련 연구 기반을 넓혔다.
심 박사는 "기록만 존재하는 것과 실제 유물·건축물·현장 자료가 함께 남아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며 "대풍헌과 선정비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실질적 지배 아래 있었다는 살아있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 "후손들에게 꼭 남겨야 할 울진의 역사"
지역 주민들도 대풍헌의 역사적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고 있다. 구산항 인근에 거주하는 김지만(80) 어르신은 "어릴 때부터 저곳을 보며 자랐고 옛날 어른들이 '울릉도 가는 사람들이 바람 기다리던 집'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며 "예전에는 그냥 오래된 집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울진의 큰 역사였다"고 말했다.이어 "독도와 울릉도 역사까지 연결된다고 하니 더 자랑스럽다"며 "후손들에게 꼭 남겨줘야 할 문화유산"이라고 덧붙였다.
심 박사는 "울진은 단순한 동해안 어촌이 아니라 조선의 동해 영토를 지켜낸 최전선이었다"며 "대풍헌과 수토사 역사를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교육·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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