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순 전 경북대학교 초빙교수
바야흐로 초(超)공감의 시대를 살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부당한 일을 마주했을 때 함께 분노하는 능력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고귀한 가치다. 사회적 연대와 정의도 결국 타인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는 공감의 능력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는 '공감'의 풍경은 어딘가 위태롭다. 언제부터인가 공감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따뜻한 끈이 아니라, 상대를 타격하고 내 편을 규합하는 날카로운 무기로 변질되고 있다.
2001년 개봉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단지 애틋한 사랑 이야기 때문만은 아니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제목은 우리가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잠시 멈추어 서야 하는 마음의 자리를 상징한다. 영화는 뜨거운 감정과 냉정한 판단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준다. 세상의 수많은 진실 역시 즉각적인 분노의 외침보다는, 한 호흡의 시간이 지나 감정의 안개가 걷힌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흔히 '냉정'을 공감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차갑고, 무관심하며, 타인의 아픔에 귀를 닫는 태도라고 말이다. 하지만 진정한 냉정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이 너무 뜨거워 진실을 가리지 않도록 통제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정신의학자나 상담사들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 내담자를 마주할 때, 무조건 함께 목 놓아 울지 않는다. 차가워서가 아니다. 함께 감정에 휩쓸려버리면 환자에게 진짜 필요한 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속 깊이 공감하되, 머리는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게 유지하며 사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내담자에게는 말을 건네기보다 그냥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해주는 조용한 침묵이 더 큰 위로를 건네는 방법이기도 하다.
과잉의 시대에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은 똑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침묵 속에서 사태를 관조하는 냉철한 시선이다. 뜨거운 가슴으로 시작하되, 머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유지하는 것. 밀려오는 감정의 파도 속에서 진짜 본질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묻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자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이야기가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할 수 있는 침묵의 시간과 냉정의 공간이다.
이러한 냉정함을 발휘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목젖까지 올라온 것을 한번 삼키는 호흡이 필요하다. 인간은 억울함을 느끼는 순간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가 작동하면서 시야가 극도로 좁아진다. 좁은 시야에 갇히면, 상황이 왜곡될 수 있다. 이때 한 호흡을 삼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는 굴욕의 시간이 아니다. 감정의 브레이크를 밟는 시간, 그 시간의 지연이 있어야만 이성적인 질문이 들어갈 틈이 생긴다.
비판할 때도 호흡이 필요하다. 반격을 가하거나 비판할 때,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내뱉는 말은 공격이 아니라 배설이 되기 쉽다. 소리만 요란하고 감정만 상할 뿐, 상황을 바로잡지 못할 수 있다. 오히려 감정 과잉 때문에 문제가 증폭될 수도 있다. 하나의 논리에 갇히지 않는 힘은 대단한 지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즉각적으로 폭발하는 반응을 멈추고, 한 호흡의 지연을 통해 이성적인 대응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소음과 이야기가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할 수 있는 침묵의 시간과 냉정의 공간이다. 광장의 소음 너머에서 침묵하는 다수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갈망하는 이성과 합리의 냉정함 속에는 과연 무엇이 들어있는가. 이제는 그 차가운 침묵의 시간을 차분히 들여다볼 여유를 만들어야 할 때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