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목의 시와함께] 천양희 ‘너에게 쓴다’

  • 신용목 시인
  • |
  • 입력 2026-07-12 14:07  |  발행일 2026-07-13
신용목 시인

신용목 시인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


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길이 되었다


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 진 자리에 잎 피었다 너에게 쓰고


잎 진 자리에 새 앉았다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 마음이


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


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 쓴다는 것은 전달이면서 그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이고 그럼으로써 갖게 되는 소진이기도 하다. 또한 일생을 이루는 것이면서 다시 그 일생을 돌려주는 것이다. 바람에게 자연에게 세계에게. 이 시는 그러한 발생과 순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꽃이 피고 지고 다시 잎이 나고 새가 앉는 저 광경과의 대칭 위에 쓰는 자의 삶을 위치시킴으로써 우주의 원리를 드러내는 것이 이 시의 전부는 아니다. 우주의 견고함조차 일순 배경으로 만들며 우리를 알 수 없는 황홀에 휩싸이게 만드는 것은, 쓰는 행위의 종착지인 '너'에 있으며 그보다는 '에게'라는 부사격 조사가 만들어내는 방향성 자체이다. 다시 말해 유독 너에게 향함으로써 이 세계는 화살의 표적지처럼 관통당하고 마는 것이다. 이 향함은 어떤 사물과 관념과 이치로도 대체될 수 없다. 우리의 세계는 오직 저마다의 단 한 사람, '너'에게 적중당할 뿐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