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인생 마지막 필기시험인 사법고시 때까지 답안지를 제일 늦게 내는 학생이었다. 문제를 풀지 못해서가 아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뼈아픈 실수를 통해 각골명심(刻骨銘心)할 가르침을 배웠기 때문이다. 공부를 꽤 잘했기에 시험 때 항상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고 그러다 50점을 받게 되었다.
시험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문제지가 앞뒤로 40문제였는데, 앞면만 풀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20문제, 1문항당 5점씩이라고 착각하고, 뒷면에 있던 20문제를 하나도 풀지 않고 제출한 것이다. 당연히 100점이라고 생각했던 시험지에 빨간 색연필로 표시된 50점은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교훈을 하나 새겨주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 교만하지 마라."
60평생을 넘게 산 생물학적 연륜도 있지만, 변호사를 하면서 다양한 인생들을 직간접으로 경험하다 보니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았다. 성공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를 정도로 다양하다. 하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오만이었다. 자신이 잘 알고 잘하는 분야에서 오만하여 방심하거나, 하나를 잘 알면 다른 것도 모두 잘 안다고 교만하면 결국 실패로 이어졌다.
범부의 경험도 이러한데, 역사는 제국의 흥망성쇠를 통해 확실한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로마나 몽골 같은 대제국이 무너진 것은 외부의 적 때문이 아니라, 권력자의 오만과 내부 균열,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지 못한 정책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역시 역사 앞에서 예외일 수 없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와 민주주의, 첨단산업 경쟁력을 갖춘 나라가 되었지만, 동시에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급속한 고령화, 저성장, 지방 소멸, 다양한 갈등의 심화 등 거대한 구조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어느 하나도 5년제 단임 정부의 임기 안에 해결할 수 없는 과제이며, 어느 한 정당의 능력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국정운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정책을 정치의 하위개념으로 전락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제도나 정책은 선거 주기가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지속가능할 정도로 장기적이고 거시적이어야 한다. 무조건 지키려고 하면서 변화하지 못하는 보수나, 기존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새로운 제도나 조직을 양산하면서 유지하지 못하는 진보 모두 문제다.
정치의 본질은 통합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현실은 정치적 양극화와 지역·세대·계층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국민까지도 국정의 동반자로 포용해야 한다. 야당 역시 반대를 위한 반대를 넘어 국가적 과제에 있어서는 협력하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정치인의 본질상 소명이든, 생업이든 다음 선거나 집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대리인이라면 현재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도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역사는 무한하다. 역사는 언제나 권력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심판했다. "당신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는가."
힘들던 경제에 반도체 특수로 부활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 정치적 오만과 무능 때문에 천우신조의 기회를 날려버리면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로또에 당첨되었는데, 또 당첨될 것을 기대하면서 아무런 계획 없이 흥청망청하면 되겠는가. 정권이 아니라 국가를 경영해야 할 골든타임에 오만과 탐욕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정치권에 한마디 해주고 싶다. 항상 뒷면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음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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